민들레 홀씨처럼

어린 시절의 꿈을 찾아서

by 기억창고

어린 시절 나는 빨리 어른이 되길 바랐다. 스스로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독립된 인격체가 되어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을 디자인하고 싶었다. 대단한 삶을 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아이들을 키우고, 직접 가꾼 작은 꽃밭에서 꽃들과 대화를 나누며, 따스한 햇살에 괄괄하게 마른빨래를 개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꿈꿨다. 다정한 이웃들과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 있는 생활을 그렸다.

하지만 나는 전쟁을 치르듯 지난 시간을 살아내었다. 맞벌이를 하면서 세 아이를 키운 시간들 속에 나는 없었다. 삶을 주체적으로 디자인하지 못하고 떠밀리듯 사는 날들이었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은 투명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현실은 때때로 나를 슬프게 했다.

휴식 없는 노동이 이어졌고 손톱만 한 여유를 찾으려 할수록 시간은 내게서 달아났다. 언제나 쫓기듯 내가 해야 할 모든 것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유년시절의 평화로운 날들을 떠올렸다.

아마도 10살 전후였을 것이다.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웠다. 난초 문양이 새겨진 사기로 된 투박한 옥빛 요강단지가 마루에 있었다. 방문을 열었다. 교교한 밤이었다. 투명하고 시리게 하얀 달빛이 멍석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슬을 피해 마주 덮은 멍석 안의 벼들은 아침 햇살이 떠오르면 고무래로 다시 고르게 펼 것이다.

멀리서 ‘커엉컹’ 개 짖는 소리가 났다. 사랑채에서 부모님과 함께 자는 막내 동생의 ‘으응’ 하는 잠꼬대 소리가 들렸다. 담벼락에 기댄 닭장에서는 ‘꾸루루’ 하는 닭소리도 가끔 들렸다.

채마밭의 감나무가 맑은 그림자를 내리며 그림처럼 서 있고, 집 뒤 대숲은 깊은 잠을 자는 듯 바스락거리는 댓잎 하나 없었다.

나는 대청마루에 오도카니 앉아 오래도록 그 풍경을 감상하였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느껴졌던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 청아한 달빛이 홍수처럼 내리면서 마을을 부드럽게 감싸던 그 안온한 밤을 생각하면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고향은 일가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마을을 감싸는 들판 끝머리에 작은 강이 바다로 흐르고 강 건너편엔 나지막한 산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면서 이어졌다. 들판은 적당히 넓어서 거기 기대고 사는 사람들에게 궁기 없는 먹을거리를 제공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들은 사금파리로 땅따먹기를 하거나 매듭이 많아 우둘투둘한 고무줄 뛰기 등을 하며 놀면서도 바쁜 농사철에는 가축을 돌보고 자잘한 집안일을 하면서 부모님을 도왔다.


석양이 산봉우리에 붉게 걸쳐지고 산그늘이 강물에 기다랗게 드리워지면, 집집마다 하얀 연기가 솟아올랐다. 노는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들 목소리가 골목길로 퍼져 나가는 저녁, 집으로 돌아가면서 붉은 해가 넘어가는 산등성이를 자주 돌아보았다. 평화로웠지만 내가 살던 동네는 좁았고 너른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어딘가에 가보고 싶었다. 거기 발길 머무는 곳에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저녁이면 나는 바람이고 싶었고 구름이고 싶었다. 그러다가 집안에 들어서면 왁자지껄한 집안 분위기에 휩쓸려 내가 생각한 것들을 모조리 잊고 즐거운 하루를 마무리했다.


도시의 한가운데서 타임 푸어로 살던 시간에 나를 지켜준 유년의 기억들, 묻어둔 그 꿈을 찾아 미뤄 놓았던 발걸음을 옮기려 한다. 세상의 중심에 ‘나’를 놓고 바람이며 구름이고 싶었던 어린 날의 꿈을 찾아 민들레 홀씨처럼 길 위에 나를 내려놓아야지. 어린 날의 그 밤처럼 자연과 하나 되는 나만의 시간을 찾아서 길을 나서야겠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