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엘 찰텐에 머물 때의 일이다. 트레킹을 끝내고 마켓에서 장을 봐서 게스트 하우스로 갔다.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육질이 부드럽고 맛있다. 넓은 팜파스 지대에서 방목하는 소라 영양분도 많다고 한다. 나는 이미 아르헨티나의 소고기 맛에 반해 있었다. 이날도 소고기 만 원어치 정도 샀다. 이 정도면 둘이 실컷 먹고도 남는 양이다.
간단한 조리용구와 양념이 비치되어 있는 게스트 하우스의 주방은 공용이다. 각자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요리를 해 먹으면 된다. 고기를 굽고 있는데 옆의 사람이 후추통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후추가 있으면 풍미가 더 좋을 텐데,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붙여 본다. 마침내 손엔 양파가 있다.
‘혹시 양파가 필요한 가요? 우린 후추가 필요한데 좀 바꿀 수 있을까요?’
‘오케이. 양파 좋아요’,
그 사람은 흔쾌히 후추통을 건네준다.
최고급 육질의 스테이크에 구운 양파를 곁들이고, 양상추와 토마토를 섞은 샐러드와 함께 밥을 먹으니 기분이 날아간다. 근데 후추가 조금 남았다. 돌려주려고 하니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후추는 티스푼 바닥에 닿을까 말까 한 미미한 양이다. 떨이로 다 쓰라고 준 거 같은데 쇠고기 한 두 번 더 뿌릴 양은 되니 이것 종이에 싸자. 친구와 함께 남은 후추를 냅킨으로 잘 싸맸다. 통이 일반 플라스틱 재질이 아니라 꽤 단단해 보인다. 활용할 데가 없을까?
장기간 배낭여행을 하다 보면 사람이 참 쪼잔해진다. 별걸 다 아끼고 재사용한다. 특히 작은 물건에 집착한다. 짐의 무게는 행복의 무게와 반비례한다.
커피를 타서 깨끗이 씻은 후추통에 담았다.
한 모금 입에 대는데 그 남자가 나타났다. ‘후추…’
'아, 이거요. 조금 남은 게 아까워서 커피에 섞어 마시는 중인데 좀 마셔 볼래요?'
남은 후추를 따로 챙겼다는 말을 하기 창피해서 통을 내밀었다.
남자의 눈이 왕방울만 해지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당신들 참 별난 한국사람. 그 표정이 너무도 웃겨 삼켰던 커피를 내뿜을 뻔했다.
그는 광저우에서 온 나 홀로 배낭여행자였다.
한국에도 두세 번 다녀왔다며 아는 한국어를 다 동원해서 말을 붙였고 우리는 중국어로 대답을 했다. 서로 자신의 외국어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말이 딸리면 자국어와 영어를 섞었다. 그의 중국어는 광둥의 억양이 섞여 있어서 같은 보통화라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어쨌든 우리가 하는 말을 그는 잘 알아들었다. 허름한 티셔츠에 가무잡잡한 얼굴이 집 나온 지 오래되어 보였다. 짐작대로 두 해가 가까워 온다는 것이다. 대단하다고 하자 여성인 우리가 더 대단하다고 엄지를 지켜 세운다. 유쾌한 한중 대화를 끝내고 남은 일정 멋진 여행이 되라고 서로 행운을 빈다.
그 뒤로 우리는 가끔 그때를 생각하며 배꼽을 잡고 웃는다. 후추를 커피에 섞어 마신다고 했을 때 그가 놀라던 표정을 당신도 봤다면 아마 눈물이 나도록 웃어댔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커피를 진짜 마셨다면? 어차피 후추통이라 씻어도 후추 냄새가 났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사소한 것도 눈물 나게 재밌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친구가 된다. 인생이 지루하다면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나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