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르토 나탈레스는 참 친근한 동네다. 처음 온 곳이지만 오래 알았던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낮은 집들과 한적하고 넓은 도로 사이에 노랗게 물든 미루나무가 어릴 적 정서를 자극했다.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가졌던 긴장감을 여기서는 마음껏 놓을 수 있었다. 가을이 주는 노란색과 말간 하늘과 여유가 흐르는 골목 풍경이 여행자를 편하게 해 준다.
마켓에 들렀다. 오늘 저녁거리와 낼 점심 준비를 해야 한다. 작은 마을 치고는 꽤 큰 마켓에서 국내산 김밥용 김과 참기름을 발견했다. 이렇게 멀리 와 있는 김을 보니 우리나라 비즈니스맨들의 수고가 느껴진다. 내일 메뉴는 김밥으로 정했다. 쇠고기와 와인은 필수고 참치와 오이피클과 당근을 골랐다. 한 병에 오천 원 안팎의 와인이 고급 와인 못지않게 풍미가 좋다.
검역소를 통과하면서 우리에게 비장의 무기?(한국 먹거리)가 있다는 것을 안 젊은 친구들이 내일은 이모님들 뒤를 따라다녀도 될까요?라고 했기 때문에 재료를 좀 넉넉히 준비한다. 갖고 있는 쌀이 부족할까 봐 오리엔탈 쌀이라고 적힌 쌀도 샀다. 이곳에는 찹쌀이 안 보인다. 찹쌀을 사면 우리가 먹는 일반미와 비슷한 밥이 나오는데 이것도 초밥용으로 쓰는 쌀이니 밥알이 날아가진 않을 것이다.
다음날 일찍 길을 나섰다. 드디어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칠레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에 있는 이곳은 바람의 땅이라 불린다.
내가 남미 여행을 계획한 최초의 계기가 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누릇누릇 퇴색되어가는 풀들이 낮게 깔려 있는 초원의 풍경이 강렬하게 나를 잡아당겼다. 아스라하고 쓸쓸하고 몽롱하기까지 한 초원에는 그리움이 넘실댔다. 그 풍경을 가슴에 안았다. 나의 첫사랑인 셈이다. 3월 중순부터 여행 기간을 잡은 것도 가을이 한창인 4월 중순에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드디어 숨겨둔 애인을 만났다.
호수의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김밥을 꺼냈다. 공원 내에는 먹을 것을 파는 가게가 없다. 다진 오이피클과 기름기를 쫙 뺀 참치, 채 썬 당근과 고추장에 볶은 멸치를 넣은 김밥을 맛본 젊은 친구들이 엄지 척을 한다. 집 떠난 지 한 달이 되었으니 서구적인 입맛으로 변한 젊은 친구라 해도 밥이 그리울 때가 되었다. 어딘가 엉성하고 어설프지만 정성만큼은 모자라지 않는 김밥이다.
김밥이 다 나가버리고 내 손에는 그들이 내민 햄버거와 빵이 들려 있다. 새벽부터 고생해서 만든 김밥인데 정작 우리가 먹을 건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김밥을 먹게 될 줄 몰랐다며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니 기쁘다. 별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되는 게 여행의 힘이다. 흔하게 먹는 김밥 몇 줄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추억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멋진 설산이 담겨있는 페오에 호수와 빙하가 녹아 흐르는 그란데 폭포, 시퍼런 유빙이 그림처럼 떠 있는 그레이 호수와 그 유명한 삼형제봉 등, 너무 좋은 것은 달리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풍경을 놓칠세라 사진을 찍고 또 찍는다. W자 트레킹을 못해서 좀 안타깝기는 하지만 모자람이 있어야 또 채울 기회가 있겠지 하고 애써 위로하다가 쓴웃음을 짓는다. 이곳은 너무 멀어서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없을 것이다. 하느님도 참. 이 멋진 풍경을 우리에게 좀 가까운 곳에 두시지. 쓸데없이 욕심을 부려본다.
내가 그리던 그 초원에는 이곳에 서식하는 야생 '난두‘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야생이 살아있는 이곳의 환경이 눈물 나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