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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Aug 09. 2021

이게 뭡니까?

칠레 검역소에서

 아르헨티나 모레노 빙하를 보고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가는 길이다. 국경을 넘어 칠레의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간다. 여행 28일 차였다.

 국경을 통과한 뒤 계속 달린다. 30분쯤 가니 사막 가운데 번듯한 신축 건물이 나온다. 칠레 세관이었다. 검역대를 통과하기 위해 버스에서 모든 짐을 내렸다. 세관원들보다 검역할 짐이 많아서 시간이 지체된다. 앞의 버스가 떠나고 드디어 우리 차례다.


 큰 가방은 검색대에 올려놓고 작은 것은 육안으로 살피다가 임의로 아무거나 선택해 가방을 열어보는 식이다. 마약견이 짐들 사이를 다니며 부지런히 킁킁거린다. 마약 같은 수상한 물건을 찾는 것이다. 세관직원이 휴대용 검색봉으로 전신을 훑는다. 그때 마약견이 내 짐 물고 직원에게 눈짓하는 게 보였다. 어라? 휴대용 밥솥과 마른반찬 등이 있는 보조 배낭이다. 누가 나 몰래 가방에 이상한 것을 끼워 넣었나? 잘못한 건 없는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체격이 좋은 여성 직원이 짐을 풀었다. 휴대용 밥솥을 이리저리 뜯어본다. 된장과 고추장, 말린 김치와 대파, 마늘가루 등 아끼고 아낀 양념들이 줄줄 나온다.

 물건을 하나씩 들어 ‘이게 뭡니까?’ 할 때마다 설명하느라 애를 쓴다. 나는 스페인어를 잘 모르고 그녀는 자국어 밖에 못한다. 마음이 급하니 구글 번역기 쓸 엄두도 안 난다. 에라 모르겠다. 이럴 때는 우리말이라도 해야 한다. 말린 김치는 입맛 없을 때 김칫국 끓여 먹을 거고요. 마늘과 대파는 모든 한국 음식에 들어가는 기본양념이고요. 고춧가루는….

알아듣거나 말거나 못 진지하게  설명했다.

인솔자가 스페인어로 좀 거들었다. 가방을 그대로 통과시켜준다.


 장기간 여행에 그리운 신토불이 양념을 가진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일행들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보물상자를 들킨 기분이다. 나이 든 몇 분에게 미리 김치찌개 대접해 주길 잘했다.

 나중에 숙소에 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짜 큰 일 날 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페루의 재래시장에서 산 생 브라질 넛트가 큰 배낭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여행 중 먹으려고 산 건데 볶은 것이 아니라 가방에 넣어 두고는 깜박한 것이다. 칠레는 농산물을 주로 수출하는 국가라서 다른 나라의 농산물 반입절차가 매우 까다롭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생과일을 짐에 넣었다가 몇 배나 되는 벌금을 냈다고 한다. 그걸 알았다면 당당하게 세관 직원에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진땀을 흘리며 버벅거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귀중한 양념들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 되었다.


 자동차로 약 한 달간 미국 횡단 여행을 한 언니로부터 말린 김치를 가져가서 요긴하게 잘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 배낭여행 준비를 하던 나는 이거다 싶었다.

 건조기에 김장김치 한통을 말렸다. 양념도 이것저것 말렸다. 여행 내내 야금야금 꺼내서 먹는 재미가 솔솔 했다. 현지 음식에 물렸을 때 입맛을 되살리는 우리 음식이 있어서 긴 여행 지치지 않 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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