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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Aug 21. 2019

사람의 숲

서로 다른 나무가 너무 가까이 있으면 어느 한 쪽은 긴 세월을 거쳐 서서히 죽어간다. 나무에겐 반드시 가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몸을 키우기위해 광합성을 하고 뿌리가 습할 땐 증산작용도 해야 한다. 주변 나무들의 성장을 방해해 옆으로만 가지를 뻗는 나무를 ‘폭목’이라 하는 이유다. 드물게 연리목 또는 혼인목으로 뒤엉켜 자라기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 즉 모진 생존본능의 결과다.

사람의 숲에서도 다르지 않다. 심리적으로 밀착한 관계일수록 허망하게 뒤집어지기 쉽다. 밀착에의 스트레스가 분명이 존재하는데 숨 쉴 공간이 없으니 마음속에 탄소가 쌓여간다. 호흡이 불편해지면 사소한 지점에서 감정의 폭발이 일어난다. 안타깝게도 믿어온 거리만큼 상처의 골도 깊다.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붙어있으되 무방비상태로 공격당할 수 있는 거리, 시종일관 떨리는 관계다. 살도 떨리고 마음도 떨린다. 설렘과 공포가 같이 온다. 크건 작건 늘 감정의 진동 또는 격랑을 참아내야 하는 관계가 왜 지속돼야 하는가. 더욱이 절친이나 베프, 영혼의 짝이라는 허망한 꾸밈말에 갇힌 채.


자연 상태에서 좋은 흙의 관건은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은 모든 죽어가는 것에 의해 유지되는 아이러니! 흙은 애벌레가 갉아먹고 남은 이파리,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나무 열매, 고독한 밤을 머리에 이고 눈을 감은 고라니의 무덤이자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호르몬이다.

우리들의 상처받은 마음이 언제까지고 연애 또는 인간관계의 무덤이랴. 행복했던 마음의 빛이 꺼진 곳에서 치료백신이 만들어진다. 그 사람은 나한테 왜 그랬을까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헤매던 마음이 비로소 갈피를 잡은 것이다. 마음은 뇌보다 덧셈뺄셈이 더딘 대신 압도적인 집중력을 갖고 있다. 무상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도 속으론 분리수거 탄소분해 저온숙성 등 감정의 찌꺼기들을 차곡차곡 매만진다. 그리하여 바람 잘 날 없는 사람의 숲을 살아낼 힘을 스스로 찾았다면 이제 어디로든 나아가면 된다. 방향은 사방으로 트여있고 길은 어디에든 있으니, 나아가라. 상심한 자리에 고여 있을 이유가 없다.


나무는 스스로 움트는 자리를 정한다. 비탈길에 자라는 소나무도 사람 눈에야 위태하지만 저들에겐 그럴만한 사정과 형편이 있다. 사람 발자국을 듣고 자라는 국수나무는 길 잃은 초보등산객의 등대다. 암만 초행이라도 지그재그로 가지를 뻗은 허리 높이의 나무를 찾아 내려오면 약수터에 닿을 수 있다. 낯가림 심한 식물도 있다. 어쩌다 길 한가운데 피어버린 타래난초는 이듬해 아무도 모르게 풀숲으로 사라진다.

과수원을 숲이라 부를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라도록 배정됐기 때문이다. 원래 나무는 저희들끼리 멀고 가깝게 서서 뜻한 바대로 자란다. 사람 눈에야 들쭉날쭉 대중없지만 저들에겐 딱 필요한 만큼의 공간이다. 그렇게 자유롭게 스킨십 한다.

사람과 사람의 거리도 규정된 바 없고 규정할 수도 없다. 어떤 마음은 헛되고 어떤 마음은 시간과 함께 농익는다. 첫 눈에 뜨겁게 지낸 마음이 내년에도 관능적으로 다가오리란 보장은 없다. 어느새 삭아버린 관계라 해도 바로 비탈로 굴려버리지 말고 두어보라. 나무에게 버섯이듯 성숙하고 건강한 관계는 삭아서도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다. 사랑받아본 자부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숲을 헤쳐나아가는 치트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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