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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Aug 22. 2019

딱 요맘때

버터링쿠키와 커피, 마지막 여름을 즐기겠다는 굳은 브이.

마지막 폭풍이 빗방울을 거두어 안녕을 고하면 청쾌한 하늘과 함께 가을이 온다. 일교차가 벌어져 공기가 찹찹해지다가 코끝이 시큰한 11월 중순까지가 내가 느끼는 가을이다. 이때가 되면 피천득의 ‘인연’을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해왔다. 그러나 내 주변에 고학력 사회적 문맹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동안 책이 아니라 부담을 떠안겨왔단 반성과 함께 ‘‘인연’ 사재기‘를 끊었다.

사실 책은 계절 따라 읽는 게 아니라 읽고 싶을 때 읽는 거지. 게임하고 싶으면 게임하고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책 읽고 싶으면 책 읽는 거다. 통계상 책을 안 읽게 된 민족이긴 한데 아직(!) 문화적이고 지성적인 면에서 상위권인 것을 보면 다른 tool로 세상만사를 흡수하고 있다는 얘기다. 독서가 주는 섬세하고 고아한 즐거움을 모른다고 삶의 질이 노골적으로 떨어지진 않으니까. 나로선 가장 오래 됐고, 한 번도 질려본 적 없는 취미가 독서이긴 하다. 독서가 나를 사람 만들었나하면 잘 모르겠고.


마지막 폭풍이 올락말락 선풍기를 들여놓을락말락 시골길 신작로에 빨간 고추가 널릴락말락하는 요맘때 아쉬움 속에 여름 과채들을 먹는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무색하게 나는 여름 열매(만)이 좋다. 가을은 곡식이 익고 열매는 그 전에 열어서 여름(열음)이랬던가. 하여간에 올 여름엔 말랑한 복숭아를 못 먹고 지나가나보다. 보관상태가 좋지 않거나 너무 일찍 따서 싱겁게 무른 것들 뿐이다. 내 사랑 가지는 한 달은 더 먹을 수 있겠다. 이후에 나오는 건 제철을 넘긴 것이라 육질이 다르다. 자두와 살구는 냉장고 빌 새 없이 사먹었고 수박을 못 먹었지만 몇 해 전 장염을 동반한 뒤로 찾아먹지 않는다. 아, 포도! 꼭지가 마르지 않은 것들이 아직 나와있을 테니 조만간 마트에 나가봐야겠다.


확실히 우리가 따먹는 열매는 자연의 섭생 다음이다. 산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거개의 나무들이 이미 옹골진 열매로 날짐승 들짐승에게 1단계의 보시를 마친 참이다. 열매가 한 번 더 몸을 틀어 단단해지면 2단계 보시가 이뤄지고, 이 친구들이 입 떼고 남은 것들이 우리들 차지다. 비닐하우스에서 줄잡아 키우는 것 말고 야생의 살림이 그렇다는 얘기다. 아까시나무 열매는 씨앗으로 숙성중이고 붉은병꽃나무의 씨앗은 바람을 타고 지상에 상륙했다. 숲의 모든 나무들은 꽃이 떨어지자마자 겨울눈 만들기에 돌입한다. 지금 산에 가보면 작은 가지에 오밀조밀 새순처럼 겨울눈이 돋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마다 올해 살림살이를 마치고 내년을 준비 중이다.

산딸기가 얼마나 맛있게요!

왜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 피천득의 책을 선물했느냐 하면 순한 에세이 때문이었다. 특히 ‘인연’ 편의 구절들은 어릴 적부터 하도 읽어서 욀 정도다. 필자가 아사코와의 엇갈린 인연을 적은 대목에선 글로 적히지 않은 내밀한 연애사를 멋대로 상상하느라 사춘기 소녀의 가슴이 콩콩 뛰었었다. 그 설렘이 마치 내겐 가을 같았다.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두 권의 책 가운데 비교적 가벼운 이 책은 사계절의 한복판을 지나왔지만 뭔가 다시 시작해도 좋다는 협의 또는 허락같아서 태풍이 갈락말락하는 요맘때에 여름과일을 오물거리며 속절없이 설레는 것이다.


며칠 전 길을 걷는데 코끝에 서늘한 바람 한 줌이 스쳤다. 가을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내게만 알은 체를 해준 것 같은 상상으로 꽤 즐거웠다. 뜨거운 햇살에 육즙을 키운 여름 열매가 좋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을의 찬 공기가 정수리를 흔들어줘야 게으른 육신이 정신을 차리지. 내년 예산안 짜고 있는 숲의 내각은 걱정말고 올 가을엔 내 안팎의 살림살이나 잘해야겠...지.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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