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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Sep 16. 2019

가을은 기척도 없이


안팎으로 수선할 곳이 여러 군데였다. 마음은 바빴고 몸은 덜컥거렸다. 와중에 앙큼한 태풍이 다녀가고 불쑥 가을이 왔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기척 없이 스미는 계절이 가을인 듯하다. 추석 앞두고 덜 여문 과일들이 태풍으로 우수수 낙과했다며 티비 속 농부들이 울상을 지었다. 주말농장 있는 쪽으로는 핸들 꺾기가 두려웠던 며칠이 내게도 있었다. 초보농사의 처참한 결말을 상상하며 단단히 채비하고 나섰다. 그런데 웬일. 지난여름 장마 때와 차이 없이 비에 홀딱 젖은 형상 말고는 작물이나 대지나 다친 데가 없다. 


축축하게 젖은 이랑을 조심히 밟으며 상태를 살폈다. 콩은 지지대를 단단히 세워두길 잘했다. 꽃 진 자리마다 꼬투리를 촘촘하게 매달았다. 새모이 되지 말라고 군데군데 콩잎을 덮어둔 알타리무 씨앗은 어느 게 잡초고 어느 게 새싹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파종이 늦긴 했지만 태풍 막아주고 새떼의 습격도 어지간히 지나갔으니 움트고 싹을 내는 것은 온전히 씨앗의 몫이다. 깻잎이나 뜯어먹으려던 들깨는 그예 꽃을 떨궈내고 씨를 품어버렸다. 남들 밭을 보니 키도 크고 아직 꽃도 안 졌던데 내 밭 깨는 체급도 마른 게 성미는 오지게 급하다. 뭘 이런 걸 닮고 그르냐. 늬들은. 콩 옆으로 조로록 심어둔 가을상추도 착실하게 이파리를 내고 있다. 다음 주면 상추에 자반고등어를 싸먹어야지. 감자에 이어 고추도 올해 풍작 리스트 가운데 하나다. 여름내 잘 먹었다. 이제 더 붉어지거나 익지 않고 가을볕에 매워질 뿐이다. 며칠 내로 옴싹 수확해야겠다. 

추워지면 가지가 몸을 안 키운다고 했다. 갓난애기 침 흘리듯 돌아서보면 보랏빛 방망이들이 주르륵 매달려있던 줄기 끝엔 어른 손가락만한 애들만 듬성듬성 남아있다. 씨앗으로 세상에 와서 꽃을 틔우고 기어코 열매를 맺은 용감무쌍한 주자들이다. 크건 작건 이르건 늦건 먹을만 하건 말건 인간의 기준일 뿐 저들은 한 해의 소임을 다 했다. 의연하다. 열매 하나 꽃 한 송이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잘 쓴 칼럼 하나 읽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심장이 뛴다.    


곧 고추와 가지를 뽑아낼 거라서 줄기 옆 빈틈을 조로록 갈아 이랑을 만들었다. 챙겨간 얼갈이배추 씨앗을 세 개씩 떨어트리고 흙을 가볍게 덮었다. 한 알은 내 꺼, 한 알은 땅 꺼, 한 알은 새 꺼다. 새 녀석들, 요렇게 신경 써 줬는데 다 헤집어놓으면 진짜 가만 안두...고 싶지만 뾰족한 수는 없다. 꽃과 열매들이 떨어진 자리를 치우지 않고 둔 덕에 땅은 땅 대로 윤기가 돌고 각종 벌레들이 날고 기어 머문다. 몇 달 전만해도 소름을 돋웠겠지만 지금은 활짝 반기면서 이랑을 만든다. 날개 달린 것들은 꽃을 풍성하게 하고 벌레들은 흙이 건강한 호흡을 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미세한 구멍을 파줄 테니까. 


호미질이 끝나갈 무렵 뜻밖의 인사를 받았다. 밭 귀퉁이 흙이 한 꼬집 쯤 저절로 튀길래 바라봤더니 등에 연둣빛 줄이 선명한 개구리가 앉아있었다. 어이 거기 나 좀 봐 라는 듯. 아니, 어이 거기 너 좀 볼게 라는 듯. 나도 보고 있지만 걔도 날 보고 있는 것 같은 쌍방대치의 시간이 한참 흘렀다. 개구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고 심지어 어딘지 평온해(!)보였다. 2~3분쯤 흘렀을까. 녀석은 기똥찬 몸놀림으로 방향을 180도 바꿨다. 나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라는 듯. 아니, 너 이런 거 할 수 있어? 라는 듯. 또 다시 침묵. 놀만큼 놀았겠다 싱거운 마음이 들어 호미를 들고 일어섰다. 안녕, 난 명절 쇠러 집에 가야해. 너도 어서 가을 속으로 풍덩하렴. 

토실토실 개구리

올해가 끝나려면 석 달 남았다. 조막만한 땅에 감자, 고추, 가지, 상추, 쑥갓, 깻잎을 심어먹었고 콩, 알타리무, 얼갈이배추가 자라고 있다. 순순한 먹을거리만 꾀 없이 하면 되었을 텐데 중간중간 딴짓 했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친구에게 받은 범부채 꽃씨를 심심풀이로 뿌렸다가 대왕마마 급으로 자라기에 분갈이해 집에 옮겨놨더니 무수리처럼 비실비실했던 일, 집에서 기르던 바질 다섯 주를 넓은 땅에서 크게 키워먹겠다는 욕심으로 밭에 옮겼다가 몽땅 말려 죽인 일, 때를 놓치고 심은 부추씨앗을 모조리 새들에게 헌납한 일 등 다섯 평 남짓 영토에선 무참한 학살과 스러지지 않는 희망, 저들끼리의 눈치싸움과 공생하는 지혜가 매일 벌어졌다. 계절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선 자리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일 즉, 삶. 그 위대함, 그 긍휼함. 


지혜가 없고 앎도 없는 주제에 덜컥 주말농장을 시작할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시작하면 용맹이라는 전차에 올라타 저질러놓고 보는 성격이다. 무식하고 무지한데 무대포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3무녀다. 다만 다행인 것은 생각은 할 줄 안다는 것. 시작하기 전에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하고 생각도 놓았다 잡았다 해본다. 올해는 그 중 하나가 주말농장이었는데 아마 절반의 성공으로 마감하지 않을까. 아무리 초보라지만 체계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씨나 모종 뿌리고 잡초나 뽑아주면 될 줄 알았던 찬란한 무지가 부른 패착이었다. 네가 '뭘' 한다고? 푸하하! 웃음부터 쏟아내던 주변 반응으로 보아 나의 어설픔과 무대포가 그들에게 big재미를 주었으니 이것만은 성공이다. 아, 알뜰살뜰 나눠먹고 내 입에 넣어먹은 달고 신선한 채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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