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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Aug 16. 2019

세상의 모든 아침

어제 한 일을 오늘도 한다. 주변을 깨끗이 하고 후진 인간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가족의 안부를 묻는다. 이 세가지를 제대로 해내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하루 중 아침에 가장 공을 들인다. 물구나무를 서거나 조기축구를 하지는 않지만 하루의 형상은 아침 기상 후 15분에 달렸다고 확신한다. 내 경우 자고일어난 흔적을 정리하고 짧은 기도를 하고 얼굴을 지압한다. 밤새 머리맡을 어지럽힌 꿈과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와 뚱하게 내려앉은 입꼬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시간. 길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이 루틴은 내가 나의 하루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특히 기도는 누군가에 의해 자존감이 뭉개지거나 천성적인 나의 후짐을 발견하고 부끄러워 죽을지경이 돼도 전처럼 바닥을 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준다.      

정해놓고 뭘 먹는 편은 아닌데 얼마 전부터 아침으로 계란 두 알을 추가했다. 몸을 움직여서 스크램블하고 방울 토마토도 기름에 구워먹는다. 상당히 귀찮지만 아침부터 먹는 일에 몸을 써두면 점심과 저녁 중 한 끼만 먹게 되거나 적게 먹게 되더라. 성가신 일을 아침부터 했다고 뇌가 속는 이치다.

누구의 아침도 방해받아 마땅한 경우는 없다. 다양한 생물들이 모여사는 숲에서는 더욱 그렇다. 숲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다양한 동식물이다.


무더위가 한풀 꺾여 숲을 찾은 이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숲 한 쪽의 잣나무 군락지엔 옅은 안개가 내려앉아 교교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금 걷다가 누군가의 아침 밥상을 만났다. 실례인 줄 알면서 상차림을 훑었다. 어느 여름날 아직 덜 여문 잣 열매가 오솔길에 떨어져있다면 건드리거나 밟지 말고 조용히 비껴 가주길. 청설모가 이른 아침부터 높다란 잣나무를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며 떨어트려놓은 그날의 아침 메뉴이기 때문이다.


모든 열매는 가지 끝에 달릴 수록 햇볕을 많이 받아 맛있게 익는다. 잣 한 방울을 이로 갉아 떨어트리려면 아침마다 청설모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골이 띵하도록 발품을 팔아야 한다. 떨어진 잣이 굴러가서 땅에 박히기라도 하면 애쓴 보람도 없이 두더지나 맷돼지 차지가 된다. 그렇다고 끼니를 거를 수는 없는 일. 아침마다 평균 수십번에서 수백번씩 잣나무를 탄다. 어제 한 일을 오늘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떨어트린 열매를 먹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순삭이다. 맛이 아직은 떫지만 육질이 쫀득하고 수분이 많아 청솔모에겐 잣만한 제철음식이 없다. 입추부터 중추절에 이르는 한달 남짓 청설모가 좋아하는 '식감 좋은' 잣이 지천에 열리는 시기다. 청설모의 성찬이 끝나고 주위에 흩어진 알멩이들은 데굴데굴 굴러다니다가 햇살 창창하고 바람 보드라운 날을 골라 뿌리를 내린다. 이렇게- 숲에서는 한 알의 씨앗이 자신의 대지를 기억하고 이어간다. 어제의 여름과 돌아올 여름을.


잠깐, 청솔모의 정확한 명칭은 청서다. 예전 선조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있던 청서의 털은 붓으로 보온용으로 쓰임이 많아서 청서의 모(털)가 고유명사가 된 경우다. 종종 헷갈리는 다람쥐는 외래종, 청서는 우리나라 토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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