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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Oct 12. 2019

가을풍경 둘- 세상에서 가장 슬픈 꽃

풍경 둘.


그해 가을해는 유난히 붉었다. 밤새 찬서리가 파고든 대지는 아침이면 붉게 떠오르는 태양에 맥을 못췄다. 땅에 뿌리내린 모든 것들이 영예롭게 몸을 키우고 익어가는 계절에 내 마음은 슬픔에 치받쳐 아무리 침을 삼켜도 울음이 목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베란다 창을 열고 햇볕 아래 가만히 앉아있자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은영아 오늘 며칠이냐.


엄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흡사 고장난 태엽시계 같았다. 한뼘짜리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오늘 며칠이니를 하루에 열번씩 묻고, 모든 음식을 씹지 않고 삼켰고, 부어오른 위장과 시퍼런 입술로 가족에게 전화를 했다. 네 동생 올 때가 되지 않았냐. 네 형 올 때가 되지 않았냐. 내 아들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냐. 아침에 나간 애가 왜 여태 안 오는 거냐.


아무도 시간의 절벽 앞에 선 엄마를 채근하거나 교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장난 시계처럼 삐그덕거리면서라도 자식 잃은 슬픔을 견뎌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는 차라리 목이 터지도록 통곡하시라고, 피멍이 들도록 가슴을 쥐어뜯으시라고 엄마의 앙상한 팔다리를 붙들고 울었지만 엄마는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는 울음을 쏟아내는 대신 안으로 통곡하기로 결심한 듯 했다. 엄마는 말을 버렸다. 잃은 게 아니었다. 단 한 음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내 아들은 언제 돌아오느냐는 수천번의, 우리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던 먹먹한 물음표를 더듬더듬 내놓던 엄마는 말의 메아리를 기다리는 대신 기어이 입을 닫았다. 말을 버린 채 엄마의 눈은 시간이 갈수록 저어 먼 곳만 바라봤다.


침묵이 일상이 되면 많은 것이 말을 대신한다. 명백한 사실이 있다면 침묵 앞에서 말은 결코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 침묵을 깨고 말을 하는 순간 말은 의미에 갇힌 신세가 된다. 그래서 침묵 앞에서 말은 더이상 귀하지도 않고 전과 같지도 않다. 귀찮고 같잖은 도구가 된다. 말과 글을 가까이 두고 사는 나는 엄마가 말을 버린 몇 번의 계절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삿되고 무책임한 말들의 범람이 얼마나 많은 진실을 수장하는지를 새삼 곱씹기도 했다. 엄마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더 세심하게 엄마를 살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는 동안 형제를 잃은 각자의 슬픔을 스스로 수습하고 수선해갔다. 엄마는 침묵의 통곡으로 남은 자식들의 상처를 핥아 거두고 계셨던 것이다.


조수석에 엄마를 태우고 가을해 속으로 차를 몰았다. 어릴 적 버스를 갈아타가며 산길을 오르고 또 올라 찾아가곤 했던 어느 절로 향하는 길이었다. 엄마와 단둘이었던 적도 있고, 형제들끼리 조막손을 잡고 올망졸망 가기도 했던 곳. 네 시간 걸리던 어릴 적 여정은 이제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했다. 차에 탄 지 얼마안 되어 엄마는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갔을까. 눈앞에 느닷없이 펼쳐진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지평선 끝까지 닿은 드넓은 평야에 코스모스가 만발해있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코스모스로만 채워진 코스모스 바다. 붉고 높은 가을해 아래 여린몸 여린얼굴로 한들한들 웃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저게, 뭐냐.


환청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마의 입에서 나온 단발마였다. 의미없는 질문들을 가두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엄마의 음절은 일년 가까운 침묵의 계절을 거쳐 단어의 형태로 터져나왔다. 나는 놀라워서 울었다. 코스모스잖아 엄마. 마령사 법당 앞에 한가득 피어있었던 거.

코 스 모 스? 아...! 코스모스!

저만치 뒤로 밀려있던 말의 실낱을 당기자 인지력이 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령사는 멀었어? 다 와가요. 근데 엄마 말하시네?

꽃이 이쁘다, 라고 말하고 엄마는 아이처럼 잉이잉 울기 시작했다. 내 아들은 죽었는데, 꽃이 이쁘다.

엄마의 시간, 엄마의 삶이 받아든 형벌을 나타내기에 이보다 잔인하고 확실한 의미를 가진 문장이 있을까. 아들은 죽었는데 꽃은 이쁘다-

엄마는 저어기 먼 곳을 보다가 가까운 꽃무더기를 만져보다가 쉴새없이 눈물을 닦았다.. 그날부터 코스모스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꽃이 되었다. 엄마의 침묵을 통곡으로 터뜨린 꽃, 슬픔의 메아리로 기억될 꽃,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해들해들 웃고 있는 무참하고 무구한 꽃.   


좀 걷자 엄마.

차에서 내리자 엄마는 내 손부터 찾아 쥐었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나는 차마 엄마의 상실과 공허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코스모스 꽃무덤이 엄마에게 절망에서 희망으로 턴아웃 해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박제된 시간 속에서 외로웠을 엄마는 느닷없이 만난 어느 풍경 앞에서 인생의 또다른 불가항력을 느낀 게 아닐까. 엄마의 슬픔이 사실은 힘이 없고 다만 견뎌내고 있었을 뿐임이 아니었을까. 슬픔이 아무리 곤두박질쳐도 공허가 아무리 살을 에어도 우리는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붉고 높은 해가 창연히 뜬 하늘 아래 서서 나는 엄마가 힘껏 슬퍼해주신 것에 감사했다. 슬픔은 고독하지않고는 헤어나올 수 없다. 꽃이 이뻐서 엄마는 자꾸 울었고, 엄마의 눈물이 나는 하마 기뻤다. 지나간 어느 가을날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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