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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Oct 14. 2019

수고로운 늙은 나무


여의도 샛강을 걸었다. 샛강역 4번출구가 시작이다. 나오자마자 뒤로돌아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바로 샛강길로 통하는 나무계단이 있다. 


중간중간 연못이랄까 웅덩이랄까 싶은 곳에 데크를 깔아 구색을 맞췄고, 벤치도 인색하지 않게 놓여있어 5킬로가 지루하지 않다. 길은 대체로 한가하다. 평일이라 나같은 수상한 한량과 새벽운동 마치고 몸풀기로 나온 어르신들 정도가 지난다. 구불구불한 샛길을 길게 튼 길이라 직장인이 업무 시간을 쪼개 걷기는 쉽지 않다.  


한강변이라 수변생태가 좋고수종도 다양해 걸을 맛이 난다. 하지만 즐거움은 금세 안녕. 모르는 나무가 태반이다. 심봉사 문고리 잡듯 가물가물 주워섬기다가 어떤 나무 앞에서 오도가니 서버렸다. 숲공부를 하면 트레킹하면서 나무와 풀, 철새와 텃새 따위에 알은 체를 하는 기쁨이 쏠쏠하다. 전쟁터에 나가는 쫄보에게 총 한 자루 생긴 느낌이랄까. 저어하면서도 흥분되고 설레면서 든든한 기분. 하여, 나무 한 그루에 마음을 빼앗겨 가던 길 멈추고 묻고 만 것이다. 실례지만 누구신데 이토록 헐벗으셨쎄오? 


나보다 상위 레벨인데도 같이 간 지인 역시 모르겠단다. 둘이서 한참 서서 뜯어보는데 아 정말 난감. 이파리를 흔들어봐도, 밑둥을 툭툭 쳐봐도 대답하지 않는다. 어쩌어찌 퍼즐을 꿰다가 겨우 녀석의 신원파악을 했다. 


쌀밥(이밥)나무로 불렸던 나무,  

학명도 '하얀 눈꽃(Chionanthus retusa)'인 나무, 

보기에는 흔해도 7년생 이상부터 꽃이 피는 나무, 

라일락 개나리와 사촌지간으로, 물 좋아하고 여리여리한 꽃을 피우는 물푸레나무과

나는 이팝나무.


늦은봄부터 여름이 시작될 무렵까지 만개해서 '입하나무'였다가 이팝나무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쌀알같은 꽃무더기를 본 게 지난 초여름인데 어느새 꽃은 지고 수피가 나달나달해져있다. 이 정도로 강렬하게 수피를 벗으려면 수령이 꽤 된 나무다. 젊은 이팝나무는 회색의 평활한 수피를 갖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세로로 갈라지다가 옆으로 넓게 벗겨진다.  


인간의 피부는 재생하지만 수피는 재생능력이 없다. 대신 방어는 기가막히게 한다. 동절기에 물이 부족해지면 수피를 떨궈내 긴축제정을 하고 벌레가 침입하면 수피를 덮어 충영(벌레집)을 만든다. 벌레가 더 파먹기 전에 제 몸에 가둬버리는 것이다. 수피가 벗겨지는 걸 수목생리학에서는 세포분열 과정에서 탈락한 형성세포들이 고질화돼 벗겨지거나 켜켜이 쌓이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런 설명은 정 없잖어.


가로수로 심어진 젊은 나무만 봐온 나는 이 노목을 알아보지 못했다. 올 봄부터 여름까지 나는 지천으로 피어 흔들리던 꽃잎들을 봤었다. 여의도로 파주로 쏘다니던 올림픽대로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늦은저녁 아파트입구에서, 후배와 걷던 동네산책로에서, 엄마와 순두부 먹으러가던 국도변에서 흔들던 하얀 손. 하필 차들이 지나는 한뎃자리, 웬만한 나무들은 픽픽 쓰러질 경사면에 피었더니 샛강에서 본 이팝나무도 수변 비탈에 뿌리를 내렸다. 

걸음을 쉬이 떼지 못한 이유는 무지에의 반성때문이 아니라(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욤) 심장 한쪽에 딸칵 백열등이 켜진 기분이 들어서다. 하필이면 가지를 옆으로 뻗는 층층나무 등쌀에 겨우 수변에 버티어 선 나무. 그 키작은 이팝나무의 너덜너덜한 수피는 마치 평생 쉬어본 적 없는 사람의 다리 같았다. 


한때는 그랬을 것이다. 창창한 나무줄기로 샛강물을 끌어올리고, 여름밤 나방떼의 습격을 막아내고, 매미의 일생일대의 구애를 응원하고, 더 많은 이파리를 내어 햇빛을 받아들이고, 무성한 꽃과 열매를 달아 6월 꿀벌과 11월 철새들을 샛강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그 시절을 영예로 기억한 채 이 자리에서 늙어가고 있을 뿐일까. 서너 발짝 물러서서 다시 바라본다. 그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수고로운 늙은 나무가 아니었다.


나는 아름다운 이팝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비탈에 기울어진 채로 땅과 균형을 이룬 나무. 울울한 가지를 뽐내느라 오히려 작은 몸이 도드라졌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잘리고 비틀어진 가지와 헐벗은 수피로 마침내 자신 만의 영토를 만들어낸 나무. 

해마다 부지런히 잎을 매달아 노련한 해바라기를 하는 나무, 거센 바람엔 일부러 몸을 세워 단단히 뿌리박는 나무, 찬서리올 때까지 열매를 달아 고향가는 철새들의 비상식량이 돼주는 나무. 하루도 허투루 산 적 없는, 여전히 청춘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이팝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총총: 수피 벗는 나무는 늘어놓기 힘들 만큼 많지만 자작나무과 가운데 자작나무, 사스레나무, 거제수나무가 대표적이다. 같은 자작나무과인데 개암나무나 서어나무는 수피를 벗기는커녕 매끈한 근육질이다. 과의 구분은 꽃이 피는 모양으로 나뉘기 때문. 카무플라주 패턴 일명 '해병대' 문양으로 수피가 벗겨지는 모과나무, 백송, 노간주나무도 남다른 존재감을 가졌다. 이맘때부터 산책로 주변을 노랗게 물들이는 복자기나무는 복장불량하기로 유명하다. 수피를 아주 너덜너덜하게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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