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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Oct 15. 2019

아름답고 절실한 것은 길 위에 있다

아름답고 절실한 것은 언제나 길 위에 있다. 

책 한권과 텀블러를 챙겨 숲에 간다. 친구는 직접 만든 차를 담아왔다. 작고 오목한 찻잔에 담아 천천히 마시며 책을 읽는다. 이럴 때 스스로 기특해진다. 내 취향이 나를 이지러진 일상으로부터 끄집어내 탈탈 털어 햇볕에 말려줄 때, 심심하다 귀찮다 쓸모없다 여기지 않고 일부러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 그 과정이 순하고 즐거울 때. 

가을이 천지에 가득하고 좋아하는 것이 최소한 두 개쯤 나를 에워싸고 있을 때 요사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위로다. 부드럽고 사려깊은 담요를 덮고 있는 기분. 그 기분으로 책을 읽다가 왼쪽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뭔가 설핏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낙엽인 줄 알았던 갈색 물체로, 집이 없는 민달팽이다. 

낯설기는 저나 나나 마찬가지인데 나는 멈추었고 저는 행진한다. 녀석은 주저도 탐색도 없이 앞에 난 길을 향하는 듯 하더니 소스라치듯 바위 틈으로 방향을 튼다. 달팽이가 이렇게 빠른 것을 처음 본 나도 당황하긴 마찬가지다. 어쩌면 정체불명의 거대한 존재를 감지했을까. 불쾌한 숨결과 텁텁한 온도와 위압적인 그림자의 움직임 같은 것.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으로 더운 숨이 나와 무안했지만 그래도 숨죽여 들여다본다. 

흐트러짐 없는 정박자다. 바위 아래로 몸을 밀 때마다 단 한 번도 허튼 움직임이 없다. 차갑고 거친 바위를 천천히 쓸면서 몸통 전체로 리드미컬하게 밀어낸다. 그렇게 사력을 다한 호흡으로 무려 0.1미리 전진한다. 사막을 걷는 수도자의 오체투지만 못하랴. 절실하기가 기도에 버금간다. 녀석이 오늘치의 기도를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아름답고 절실한 것은 언제나 길 위에 있다. 

그것들은 위험하다. 사방에서 어떤 위협이 튀어올 지 알 수 없으며 길에서 만난 존재는 친구일 수도 적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직감과 경험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어느날의 민달팽이는 포악하지만 관대한 나같은 나그네를 만나고 또 어느 날의 민달팽이는 며칠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삵을 만난다. 

유난히 가혹한 운명에 놓인 존재들이 있다.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하고 무의미한 소리들에 귀를 닫을 수도 없다. 크고 작은 행동 하나마다 타인의 해석으로 정리되고 판단되어 저울 위로 올려지는 기분을 담담하게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설리의 연애, 설리의 SNS, 설리의 가슴, 설리의 악플로 이어지는 궤적이 나는 아프다. 파행이 여럿이었지만 그는 여전한 도제시스템 속에서 페미니스트 아이돌로서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젊은 여성이었다. 타고난 스타성에도 온전히 사랑받지 못했다. 또래 중 가장 많은 소통의 몸부림을 쳤음에도 가장 무참한 불통의 벽에 부딪혀왔다. 

특별히 그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지만 난도질 당할 때마다 어렸을 때 본 마술쇼가 떠오르곤 했다.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도 저건 너무하잖아 라는 마음. 붉은 천이 덮힌 커다란 상자에 반듯이 누워 마술사가 쑤셔대는 대검을 받아내는 미녀 같았다. 곧 미녀의 피로 붉은 천은 더욱 붉게 물들어 바닥을 흥건하게 적실 것 같은 두려움과 불쾌감. 


슬픈 눈과 웃는 입, 아름답고 절실한 얼굴이 하루종일 인터넷을 유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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