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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Dec 02. 2019

되바라진 얼치기로 남겠어


숲에 갔다가 풍뎅이 주검을 만나 목례한 날 

친구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샐러드 위에 얹혔달까 박혔달까 하여간 반짝반짝 빛나는 건강한 터럭 하나를 집어들었다. 마침 식탁 아래의 거대한 털뭉치가 냐옹 하고 운다. 윤기나는 회갈색 털의 주인이었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른하게 깜박인 뒤, 털뭉치를 촤라락 일으켜 신나게 핥기 시작했다. 역광이었으니 망정이지, 햇살 아래였다면 녀석의 털이 날아올라 내 밥그릇 위에 착지하는 게 보였겠지. 친구가 차려준 밥상은 훌륭했지만 입안이 까끌해서 식욕이 돌지 않았다. 저 많은 고양이 털은 어떻게 처리해? 갓 차려낸 음식 위에, 세탁소에서 찾아온 블랙 코트에, 막 빨아널은 팬티에 온통 고양이 털이 묻지 않냐? 친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히 있어도 피부에서 자연탈락하는 각질과 머리카락, 무시로 살포하는 방귀와 트름의 역겨운 가스들, 아침저녁 비누로 세신해야 하는 비효율덩어리인 인간에 비하면 고양이는 독립적인데다 환경친화적인 동물이야.' (알았으니까, 밥은 그만)


친구가 비염에 고양이털 알러지까지 있으면서도 만두를 반려묘로 받아들인 이유는 지인의 횡사로 인해 별안간 거처를 잃은- 혈통만큼이나 성격도 까칠한 고양이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 때문이었는데, 지금의 연대감을 갖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단계' 중이던 어느날 밤 만두는 무참한 슬픔에 휩싸여 우는 친구의 헐떡이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흐느낌을 멈추게 하고 숨소리가 골라져서 마침내 고요한 강물같은 잠에 빠질 수 있도록 끈기있게 온기를 준 전무후무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뭉클하게 잡힐 것 같은 뜨겁고 무방비하며 작은 심장은 위로 또는 안정감 이상의 치유를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인데...


반려묘와 반려견과 함께 하는 삶이 지금보다 정서적인 안정을 줄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어릴 적 개와 고양이 모두 키워본 자로써, 안봐도 비디오로다가 너무 신나하면서 적응할 테지만) 아직은 그들과 동반하는 삶으로 방향을 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살아오면서 몇 차례 키를 돌려 항로를 바꿔왔다. 생각해보면 중요한 결정들은 모두 스스로 내렸다. 북북서이건 남남동이건 비교적 주체적으로 건너온 것 같다. 인생의 좌표들을 오롯이 찍고 혼돈 속에서 버텨내는 것이 어른의 항해라면 나는 신중함이 한참 모자란 얼치기 항해사다. 그 가운데 지금 나의 항로는 그 언제보다 망망하고 대해하다. 등대도 키도 없다. 재미없고 선뜩한 사실 하나는 내 주변 어른들은 '시험삼아 해본 결과' 따위는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은 나도 그렇다. 우리는 갈수록 까칠하고 무뚝뚝한데 경험치는 쌓여서 '척' 하면 견적 나오는, 뻔하고 지루한 어른이 되어간다. 


입에 풀칠했을 뿐인데 치울 거 천지

내가 갇혀있는 편견이 얼마나 견고한가를 깨닫는 데에도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나는 고양이 털이 내 접시 위에 떨어지는 상상만 해도 밥맛을 잃는 이기주의자다. 쓰레기를 줄이는 노력을 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옷을 보면 사고 싶다. 아침밥 한 번 먹고나면 최소한 접시 두 장 이상, 컵과 종지 두 개 이상, 커트러리 두 개 이상, 음식찌꺼기와 휴지들은 수북하게 쌓인다. 등산이나 산책 땐 신나게 걸으면서 마트 갈 땐 차를 몰고 나간다. 최대한 안 걷기 위해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굳이 찾아서 주차한다. 산에서 담배피우는 사람을 경멸하면서 몰래 불법캠핑을 하고 라면을 끓여먹는다. 야이~! 다중인격자야! 나는 이런 내가 끔찍하게 귀여워 미칠 지경이다. 아하하하하! 

   

며칠 후에 만두(와 살고 있는 내 친구)를 만나러 간다. 항로변경으로 치면 서울 사대문 안에서 남부럽지 않게 과감했던 그니와 윤기나는 털을 세심하게 골라낸 식탁에 마주 앉아 나의 더듬이 항로를 주제삼아볼 참이다. 아몰랑 까짓거 해보는 거지. 나는 좀 늦된 어른이 돼도 좋다는 생각이다. 체력고갈로 몸은 중늙은이가 되어가지만 막상 어른이라고 할 순 없는 정신머리이기도 한 마당에 되바라진 얼치기로 남으면 어떠랴도 싶다. 둘 다 재미없고 뻔한 어른보다는 박진감 있다. 사는 동안은 나대로 살아보자는 위험천만한 좌표를 향해 돛을 올려 나아가고 있다. 음. 미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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