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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Dec 05. 2019

이런 여자가 좋더라

좋아하는 사람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론칭했다. 향수와 보디제품을 라인업했는데 공식SNS의 첫 이미지를 보는 순간 이미 설레기 시작했다. 우리의 친분은 제로. 그니가 어떤 사람인지는 몇몇 매체에 소개된 인터뷰, 개인 SNS를 통해 유추할 뿐 지인의 지인으로만 알았고 그마저 오랜 얘기다.

인터뷰 속 몇 개의 단어와 늦은 밤 올라오는 사진 한 장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가 있는데 자기 삶의 균형을 지키기위해 애를 쓰는 샤이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일수록 아주 작은 부분에서 그 사람의 전체가 노출돼버린다. 짐작컨대 그니는 이런 영역에 속한 여자다. 나는 SNS 피드들 사이로 이따금 드러나는 날 것의 사랑스러움과 유쾌함이 좋았고, 자아도취했다가도 일순 우울한 바보가 돼버리는 모습도 좋았다. 그니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을 응원하기 위해 평일 오후 북한남동 스튜디오에 손님으로 드나들기도 여러 차례였다.


가령 연애할 때 나는 남친이 낮과 밤을 보내는 공간이 우선 궁금하더라. 낮의 공간이 궁금한 건 부디 열일해서 맛난 거 사먹자는 게 아니라 노트북과 머그컵과 피규어와 에어팟이 놓인 책상에서 그가 일할 때 자주 멍때리는 습관, 삐걱거리는 의자 등받이에서 아이디어가 안풀릴 때 벌러덩 의자를 젖히는 습관, 뒷축이 닳은 슬리퍼에서 발로 의자를 찍찍 끌어 옆자리 동료와 얘기하는 습관을 점쳐볼 수 있어서다. 사적이고 내밀한 밤의 공간이라면 말해 뭐해. 상상만으로도 마냥 재미있다. 일기장 훔쳐보는 것보다 입체적이고도 온당한 관음이다.


공간은 한 사람이 시간과 함께 차근차근 채워넣은 구조적 이력서다. 거짓없이 진실해야 제대로 된 이력서이듯 이질적인 것 투성이의 공간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공간을 잘 꾸미려는 사람보다 공간에 잘 스미는 사람이 좋다. 이것저것 잘 꾸며놓은 공간보다 들어서는 순간 주인 그 자체인 곳을 보면 마음의 빗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다. 그 공간을 떠올릴 때 가장 첫 손에, 그리고 맨 나중까지 기억되는 것은 바로 그곳에 머문 향기다.


한때 쇼핑을 인생 최대의 행동강령으로 삼았던 마구니시절 온갖 돈지랄로 정서적 정신적 정산적 폭망을 거친 바 있다. 그때 알게된 게 있으니, 돈지랄하게 하는 냄새가 있다. 내가 가진 것을 초라하게 만드는 냄새, 싼티나는 고급스러움과 고급스러운 싼티가 이음동의어란 걸 알려주는 냄새. 일간지 유통 담당을 맡으면서 럭셔리마케팅을 접할 때면 특유의 '돈냄새'가 떠올라 비위가 미슥미슥해진 것도 내 공간에 향기를 들이는 일에 민감해진 이유다. 나는 냄새를 감추기위해 냄새를 덧입히는 건 바보짓이라고 생각한다.


하필 이번 그니의 제품 라인업의 핵심은 향기다. 이십년 넘게 기분내킬 때만 쓰고 있는 불가리 향수를 제외하고 내 화장대와 욕실에는 인공발향하는 제품이 없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서 주문버튼을 눌렀고, 망설임이나 염려는 없었다. 그니가 적은 리플릿 속 설명대로 거짓없이 좋은 향을 담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도착한 보디워시 마개를 열어보니 어땠냐고? 딱 내가 좋아하는 무게와 온도의 향기가 목언저리와 배꼽을 감아도는 바람에 어젯밤 샤워하고 자는 내내 심쿵했다. 괜히.


일면식도 없는 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칭하다니 나도 내가 신기. 이글을 쓰면서 생각해보건대 아마도 나는 그니가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알아서 좋은가보다. 그런 사람은 뭘해도 조마조마 천근만근 열심히 제대로 해낼 수 밖에 없다. 뭔가 쓰임새가 있는 물건을 내놓는다면 정말 '생긴대로' 만들어내겠구나 싶었었다. 거봐. 내 진작 알아봤지. 제품을 써보고 나서 더욱 그니가 좋아졌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자들 가운데 내가 매력을 느끼는 케이스를 보면 몇 가지 공통유형이 있다. 감각적인, 감정에 솔직한, 뜨겁게 연애하는, 피부 건강한,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여자다. 저런 여자가 되고 싶다는 롤모델로서가 아니라 저런 친구랑 일하고 싶다는 파트너로서 대상을 바라본다.


이런 여자들은 두말하면 입아프게 일도 잘한다. 일 잘하는 여자를 보고있으면 질질짜는 스타일 아니네? 주변과의 시너지 장난 아니겠는걸 같이 일하고 싶다로 연결되는 짜릿한 쾌감이 있다. 자기 필드에서 실력으로 끝내주는 여자 또는 남자 이상으로 섹시한 경우가 있나? 난 아직 못봤다. 그것도 자기 것으로만, 자기가 쌓아온 이력서로만. 여하튼 웰컴백.   


#기대이상으로제품이좋았어서살짝흥분

#오늘밤도부질없이심쿵각

#에라이


오늘 만난 갈대. 추워서 달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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