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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Jan 02. 2020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음  



아침에 거울을 보고 어제보다 예뻐진 내 얼굴에 깜짝 놀라곤 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매끈한 피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매가 내가 알던 내가 아니네? 그 순간 느닷없는 생얼부심이 차올라 나도 모르게 소박한 가슴을 펴보는 것이다. 


이 망할놈의 착시는 노안 덕이다. 몇해전부터 찾아온 노안 필터를 걷어내면 아침의 내 얼굴은 참상에 가깝다. 피부는 중력에 저항하는 법을 잃고 어제보다 한층 단단하게 내려앉았다. 생각에라도 잠길라치면 심술궂은 중국부자처럼 입꼬리가 반원으로 엎어진다. 초조한 마음으로 멀쩡한 구석을 찾아보지만 그럴수록 이마에 주름만 선명해지고, 그거 편다고 검지로 문질문질하다 풉 웃음이 난다. 신이 인간의 시력을 주저앉히는 것은 사물을 보이는 것보다 멀리 두어 불편한 진실일 수록 지그시 바라보라는 뜻일 터.


(아침의 내 얼굴만 빼고) 뭔가를 본다면 자세히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본다'의 여러가지 의미 가운데 나의 본다는 '기록'에 가깝다. 기록하는 습관은 취미가 되고 장기가 되고 직업이 되었는데 그 과정은 한번도 올이 풀리지 않은 실타래처럼 길게, 자연스러웠다. 나는 본 것을 기록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했다. 


더러 깊이 볼 수록 어리숙하고 조야한 것도 있다. 그러한 순간에 오히려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이 심미안이다. 아름다움 너머의 아름다움, 추함 이면의 진실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할 텐데 눈 앞에 있는 것에만 파르락불그락하느라 어느새 마흔줄도 지나간다. 축하한다. 모질아. 


은방울꽃 @우보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던 나태주 시인의 시 제목은 '풀꽃'이다. 허리를 굽혀야만 겨우 보이는 작은 풀꽃은 시인의 찬란한 눈길을 오묘한 생명력으로 받아냈다. 한 송이 꽃에는 우주가 담겨있다. 법정스님은 우연히 피는 꽃은 없다고 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것. 꽃의 간절함이 먼저라는 거다. 절실한 씨앗이 꽃을 틔우고 봄을 부른다.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은 데생예찬으로도 유명한데 어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데생을 통해) 낱낱이 보는 연습을 하십시오. 찰나의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당신은 한층 수준높은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력이 나빠져 자세히 보는 행위엔 물리적인 통증, 두통이 따라온다. 노안이 오기도 했고 난시까지 있는데 안경을 쓰지 않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만, 고집은 고집이고 상실은 상실이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어 낭패 본 적이 여럿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천천히 눈에 담게 된다. 속도가 줄어든 만큼 오차도 줄었다. 자세히 보는 훈련을 위해 데생을 배울 필요까진 없겠지. 다만 짧지만 또렷한 시선, 작고 사소한 기록들이 모여 파동이 되고 의미를 갖추고 나아가 역사가 된다. 자세하고 낱낱하게 볼 이유는 분명하다. 


컨디션 좋은 날은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는다. 뷰티계의 간디 즉 무중력무저항주의로 탄력과는 담을 쌓고 있는 모공천국 내 피부를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보는 것은 기록하는 것이다. 오늘도 노련하게 거울을 피하면서 이렇게 기록해둔다. 피부 맑음. 리즈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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