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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May 05. 2019

봄숲 붉은 잎

사람 사이의 장력은 기기묘묘하고 다채롭다. 누구에겐 홧홧 달아오르고 또 누구에겐 좀처럼 걸음이 옮겨지지 않는다. 어떤 이에겐 조건이 없고 어떤 이에겐 빗장을 건다. 그러나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 하나가 있다. 잘났건 못났건 제가 받은 상처에는 초연할 수 없다는 것.

평상심을 갈고닦아왔대도 어려운 일일 뿐더러 저쪽의 무례를 묵묵히 참아내야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누구든 상처받고 싶어서 관계맺는 사람은 없다.


모든 관계에 장력이 있듯 봄 숲도 나무들의 장력으로 어우러진다. 저마다 개성이 드러나는 봄이 되면 저 멀리서부터 보오얗게 초록 물이 든다. 갈색 겨울눈이 연둣빛 잎을 틔우고 초록으로 무성해지는 과정을 한날한시에 치루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하나의 색, 하나의 시간으로 규정할 수 없으니, 봄은 뽀얀 녹색이다.


목적은 햇빛이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더 받아 잎을 키우고 꽃을 틔워야 일 년을 살아낼 수 있다. 모두가 녹색으로 나아갈 때 붉은 가지에 붉은 잎을 내는 나무가 있다. 단풍나무다. 생뚱한데다 부지런하기도 해서 4월이면 나무 가득 발그레한 잎을 매단다. 봄숲에 창창한 붉은 잎을 보면 지난해의 단풍이 여즉 매달린 줄 착각할 정도다.


원인도 햇빛이다. 녹색생물들에겐 초강력 에너지원인 햇빛이지만 어린 단풍나무에겐 상처받을까 두려운 존재다. 동물과 식물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엽록체의 유무다. 우리 모두 생물시간에 배운 바대로. 그런데 단풍나무의 엽록체는 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가 점점 자라면서 생겨난다. 붉은 빛을 내는 색소를 잡색체라고 하던데, 단풍나무는 엽록체보다 잡색체가 더 많단다.


태생적으로 엽록체가 부족한 걸 알아서, 자외선을 받아도 어린잎이 상처받지 않도록, 태양에 맞짱 뜨면서 잎을 키워나간다. 어느 정도 몸집이 커지고 엽록체 영양분이 나무 전체에 퍼지면 쨍한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태양이 두렵지 않아진 것이다.   


여리고 붉은 다섯 갈래의 잎맥은 촘촘한 투쟁의 역사다. 봄이 무르익을수록 햇살은 강해지고, 나무는 본능적으로 잎을 틔워내기 시작한다. 이때 엽록체가 없어 자칫 파괴될 새 잎의 운명을 나무는 붉게 물들여 액막이 하는 거다.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는 편인데 상대방의 무례와 음험한 저의가 감지되면 평상심이라고는 1도 없이 몸이 떨린다. 무슨 의도인지 알아내기 위해 곰곰 생각하고 시간을 들인다. 그로인해 내가 받을 상처와 그에 대해 내가 던질 상처의 말로 벌써 두려운 나머지 심장이 불규칙하게 진동한다.


어쩜 그렇게 자기방어에 열을 올리느냐고 묻는다면 인간이라 그렇다고 대답할랜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변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내고 싶다. 어릴 때 범상했던 성정이 어른이 되면서 성인군자가 될 리 없듯이 상처받을 때마다 한결같이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은 타고나기를 내 안에 태양에 의연할 엽록체가 부족한 때문일 거다.


매해 봄, 단풍은 붉은 잎을 낸다. 모두에게 축복인 햇살이 나에게는 꼭 그렇지 않다고 독야홍홍 주장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별나대도 할 수 없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생겨먹었다. 단풍이라고 햇빛 아래 초록연하고 싶지 않았을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공포와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감내하기 위해 본색을 바꿔버린 필사의 안간힘이다. 봄, 모든 것이 이토록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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