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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May 09. 2019

구체적이지 않은 평화

은방울꽃. @우보

높은 곳에 가면 심장이 떨리고 무릎과 발바닥에 지진이 일어난다. 뭐라도 붙잡고 서있거나 풀썩 주저앉아 몸을 최대한 옹송그린다. 그런 다음 천천히 가슴을 펴면 세상이 눈에 들어오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전의 완강한 행동은 엄살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높은 곳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번다한 것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원시감은 매력적이다.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졌을 때 예상하지 못한 평화가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너무 사랑하면 너무 외롭고, 배신감은 믿어 의심치 않은 찰나에 찾아온다. 다 안다고 생각한 관계일수록 확신은 절망을 부르고 후회는 아프게 머문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관계는 모두 우리가 능동적으로 맺은 게 아니라는 아이러니. 수백 수천의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본질이 변하지 않는 관계는 가족 즉 생으로부터 부여받은 것뿐이다.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무궁무진한 행복감을 동시에 주는 관계는 가족 말고는 없다. 가족얘길 하려는 건 아니니까,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관계랍시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어릴 때부터 이미 관계맺기는 레고 블록처럼 단절화, 습성화돼있다. SNS 품앗이로 쌓아올린 친분만으로 친구 부자인 양 착각하고, 밥 먹자는 약속을 수년째 밥 먹듯 던지면서, 겉으로만 간절한 우정을 쌓다가 사소하게 절교한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섞인 그룹은 언젠가 탈이 난다. 진중한 관계맺기로 단련된 사람들에 의해 자연 복구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 모양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요즘 나는.


지금은 오래돼서 피부처럼 편한 무명옷 같은 사람들만 듬성듬성 만나고 있지만 사실 오랫동안 나는 인간들 틈에서 존재의미를 찾는 오지라퍼로 살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싶을 만큼 나의 일상은 소란했다. 절친 베프 소울메이트 같은 대괄호 속에 묶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내 삶에서 스윽 지나갔다. 공기처럼 가벼웠다.

어쩌다 지나간 사람이 안부를 물어오면 물론 기쁘다. 그런데 시간을 거슬러 옛일을 추억하고 현재를 풀어내며 다음에 또 만나자고 기약없이 손 흔드는 일이 너어무, 너어무 번거롭다. 액정에 이름이 뜨고 전화벨이 울리는 동안 나는 과거의 내가 되어 반갑게 끌어안고 희희낙락 즐거운 얘기로 풍덩한다. 추억의 자맥질은 길게 울리던 벨이 멈출 때 함께 끝난다. 잘 지내(죠)?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라는 문자와 함께 찍힌 부재중전화는 그래서, 그렇다.


딱 잘라 말하면 인간이라면 더 알고 싶지 않다. 이 불온한 마음은 상대적이다. 나 역시 타인에게 평면적으로 보이기를 바라면서 최대한 나를 드러내지 않게 된다. 서푼어치 존재감을 줄이고 필요한 만큼만 소통한다. 나 왜 이렇게 유난스러워졌지 하면서 스스로 웃은 적도 있다.내가 변했나? 그러지는 못했을 거다. 인간이 변할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 괜찮은 인간으로 개과천선하고 싶으니까. 아마도 ‘당분간은 좀 떨어져서 옹송그리고 싶은’ 내 안의 형질이 두드러져서 지금의 나이테를 만들어가는 중일 거다.

구체적인 관계라고 믿을 때가 가장 허망하다. 구체적이지 않을수록 평화가 찾아온다. 나는 복닥이는 소란으로부터 원하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사람들을 조금 흐리게 보고 싶다. 보오얀 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산책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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