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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Jul 12. 2019

살아가는 이야기라니요


용산에서 지인들과 점심을 먹었다. 광화문으로 출퇴근하면서 일하러 또는 놀러 방앗간처럼 들렀을 뿐 아니라 용산구에서만 열추 십년을 살았다. 제3의 고향쯤 될까. 늘어진 젖가슴과 실팍한 허벅지의 언니들이 자신을 구경하는 행인을 구경하던 유리감옥부터 그니들을 '청소'하느라 순경들이 골치를 앓던 파출소, '용산 참사'라는 태그를 달고 잔인하게 빈부가 갈렸던 이촌동 골목길, 모든 게 헐린 채 눈비 맞던 광활한 공터, 철골 구조물과 흙먼지를 뒤집어쓴 거대한 콘트리트 박스까지 저마다의 치열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곳. 오랜만의 용산은 너울너울 그 모든 기억을 덮은 채 스카이라인이 바뀌어 있었다. 


발빠른 후배 덕에 아이파크몰 7층 창가자리에 앉아보니 건물은 실제보다 더 아찔해보이도록 설계됐더군. 높은 곳에 공중부양된 쾌감을 만끽하라는 계산이겠지. 정작 우리중 누구도 그런 배려에 감사할 줄 모르는 인사들이어서 뷔페 식의 푸짐한 점심에만 열을 올리던 중 이 자리의 호스트인 선배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언제나 끝내지 못한 일을 하이힐 뒤꿈치에 달고 다니는 분이라 늦을 걸로 예상됐던 바다.  


밥벌이가 가진 힘은 오묘하다. 같은 매체에 근무한 적도 없고 취채처가 같았던 적도 없는데 겹치는 지인이 줄 세워 많다는 이유로 한 칸 쯤 서로에게 붙어선 관계랄까. 펜 굴려서 밥먹었던 동류의식으로 나는 그를 반가운 선배로, 그는 나를 막역한 후배 대하듯 한다. 뭐하고 사나 궁금해서, 만나서 살아가는 이야기나 하지 뭐, 라는 선배의 전화는 실제로 반가웠다. 그와 나의 떨어진 칸 수 만큼 우리는 이렇다할 역사가 없었고,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감은 심리적 저항을 주지 않았다. 체력이 달리는 요샛날 초근접 지인들과의 만남은 무리다. 비코오즈 감정의 격랑을 타느라 술이 당기거든.


그러나 누대에 걸쳐온 진리대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선배는 앉자마자 호구조사부터 시작했다. 잘 다니던 회사는 왜 그만 둔 거야, '재작년 일 말하는 거에요?' 아니 그 전에 20012년 쯤 말야. 그때 은영인 회사에서 좋았잖아. '....' 그럼 재작년엔 왜 그만 둔건데? 일은 전혀 하지 않는 거야? 새 책은 언제 나와? 결혼은 아예 안할 작정이야? '...' 일도 안하고 요새 뭐 먹고 살아? 새 책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데? 싱글은 뭐랄까 외롭지 않니? '...' 


아 이런 사람이었지! 내가 벌려놓은 그와 나 사이의 칸은 다 이유가 있었다. 개인의 일신은 일신대로 두고 보다 담백한 대화가 오갈 것으로 기대했다니. 개인의 일신을 '처리' 또는 '해소'하듯이 묻는 선배 앞에서 나는 가까스로 뚫어놓은 장이 다시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위는 좋아서 맛난 음식들은 소화했다마는. 

나름 예를 다해(아까 대답했구만 왜 자꾸 물으셔?! 라고 나중엔 발칵 했다마는)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묻고 또 묻는 이유는 그에겐 내 대답이 정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뭔가 더 애시드하고 드라마틱해야 했다. 그걸 물고 훨훨 날아 여즉 내 근황이 궁금할리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금세 휘발될 이야깃거리로 풀어놓을 테지. 아아 선배는 얄미운 파랑새. 악의가 없어 더욱 못미더운 빅마우스. 


살아가는 이야기나 하자,는 말의 무게를 생각한다. 우리가 오독하고 있는 저의를 생각한다. 허물없이, 허심탄회하게, 가볍게 등등 잠자리날개처럼 무책임한 전제가 아니다. 상대가 보내고 있는 시간에 대한 존중이 바탕되어야 그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고 이해된다. 내가 홀로 내뱉은 말도 시간이 지나면 헷갈리는데 하물며 타자에게 발화한 말과 내용의 오독 가능성은 헤아릴 수 없다. 최대한 진중하고 서두르지 않는 태도로 가만히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그때 하자. 너와 나의 살아가는 이야기. 


(굳이 선배를 지칭하려는 건 아니다만 뜻밖에 영감을 준 양반이긴 하므로 짚고 넘어가는 글.) 


사진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복숭아다. 주변에 복숭아 알러지 있는 사람이 더러 있어서 내놓고 먹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 최근엔 퇴원한 나를 간호하러 온 언니도 복숭아란 말엔 미간에 주름부터 만든다. 다용도실에 내깔려뒀다가 1일1복숭아 하고 있다. 꺼칠꺼칠한 심신에 이만한 수분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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