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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Jul 07. 2019

오냐 태양아


취존생활(맞나?) 이라는 프로에서 채정안이 시즌마다 유행하는 약이란 약은 다 먹어본다고 호언하자 진행자가 요샌 뭐가 유행이냐고 물었다. 그는 "단연코 유산균"이며 "***에서 신제품이 나와 내 몸에 테스트 중"이라고 강조했다. 유난스럽다고 코웃음친 그날로부터 한달 뒤 나는 수렁에서 대장을 건져올리면서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쏟게 된다.


나에게 장건강은 '국민연금 입금일'처럼 지금은 몰라도 되는, 나이들어가매 자연스레 체득될 키워드였다. 나의 대장은 치명적이랄 수 있는 잦은 음주생활에도 흐트러짐 없었다. 유당소화효소 결핍증 즉 유제품 먹으면 직빵으로 설사하는 것만 빼면 꼿꼿했다. 그러던 언제부턴가 잔변감과 함께 배에 뭉근한 통증이 찾아왔다. 처음엔 일상적인 통증이었기에 전날 먹은 걸 떠올렸지만 도무지 각이 잡히지 않았다. 통증은 기분나빴고, 잦았고, 심해졌다.


결론은 이거다. 몇해 전 혹 하나를 뗀 부위에 장이 착 달라붙어 폐색이 온 것. 길고 예민한 또아리를 연동해 공장을 돌려야하는데 그 부위가 막혀있으니 부글부글 끓다가 주변의 장기를 치대면서 좌충우돌했을 터다. 그때마다 나는 걷지도 앉지도 눕지도 못하게 괴로웠는데 인간인지라 낮에는 할 수 없이 두 다리로 걸었고 밤에는 할 수 없이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다 이티같은 배를 안고 응급실에 가고 응급으로 수술날짜를 잡았다. 일주일동안 세 군데 병원을 거쳤다. 정기검진받던 전문병원, 집근처 대학병원, 지인 찬스로 파고들어간 대형병원까지 어찌나 선명하게 본연의 색을 드러내던지 물성있는 모든 것은 저마다 캐릭터가 있음은 응급상황에서도(어쩌면 응급상황이어서 더욱) 피해갈 수 없는 진리더라. 오늘로써 퇴원하고 일주일째다.


엄살이 있는 편인데 임계치다 싶으면 무심하게 표변한다. 위기에 맞서 돌파하려는 의지냐고? 설마 그럴리가. 말 그대로 무섭기 때문이다. 작은 부속기관 하나를 더 떼어내고 유착된 장을 분리하는 수술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고 공포가 덜하지 않다. 같은 의미로 죽을 고비가 직감되는 순간이라해도 나는 엄살은커녕 안간힘을 써 쎈 척 할 테지.


수술날짜가 잡힐 때까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숲 탐사를 가고 지인과 트레킹을 하고 주말농장에 가고 술을 마셨다. 손이 왜 이렇게 차요? 술 마셔도 되요? 트레킹 뒤풀이에서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껄껄 웃었다. 괜찮아요. 수술 전날 병원에서 위와 장을 깨끗이 씻어줄 거니까- 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스스로에게 만정이 떨어지고 있었다. 누가봐도 안괜찮은, 걱정과 불안과 공포를 짊어지고 왈왈 까부는 꼴이 진심으로 지긋지긋해서.    


숨길 수 없는 건 이거다. 한번 아픈 곳이 다시 아플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신체나이)에 대해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런 채로 마흔의 중턱을 넘어왔고, 잘난 척 하면서 구축해온 '굴절 심한 나만의 세계'를 어떻게 부숴나갈지 그도 못하면 보수해나갈지 막막하다는 사실.


늦은 밤에 문병온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 배에 구녕 뚫었다고 미스코리아 못나가면 어쩌지?

친구가 대답했다. 괜찮아. 수영복심사 없애면서 CT도 안찍는대.

 

닷새 입원했고 4일째부터 나오는 입원비가 4만원씩 8만원. 이거 보태서 발뮤다 선풍기를 알아본다고 했더니 주변 사람 모두가 대환영이란다.

유유상종, 장밋빛 인생이로구나.


사진은,

복강경수술 때 집어넣은 가스가 빠지고 움직일만 해서 토마토를 썰어 햇볕에 널었다.

오냐 태양아, 오너라. 당도 높게 말라주마!

벌건 속살의 토마토가 배째라며 드러눕는다. 쨍쨍 비춘다고 미울 건 태양이 아니다. 그는 제 일을 할 뿐 좋을 건 토마토다. 더 풍부한 육질과 당도로 버텨낼 거다. 안아픈 척, 멀쩡한 척, 조급하지 않은 척- 지긋지긋한 위악을 버리고 온전히 나로서 순순하고 심심하게, 속살 보여주고 속근육 채우는 토마토처럼 그렇게 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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