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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댁 May 03. 2021

불소동

너와의 365가지 행복의 맛 #121

#벌건 하늘


새벽 4시 50분쯤 아기가 깨고,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수유를 했다. 아기는 잠이 깬 듯했지만 조금 더 자고 싶어서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벌갰다. 번쩍거리며 천둥번개가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심상치 않아서 남편을 깨웠다. 그리고 일어나서 창문 앞에 섰다.


"뭐지...? 어젯밤 회오리바람이 불었다는데  찾아온 건가?"


처음 보는 광경 앞에 무슨 일인지 파악하려고 애쓰면서도 위험이 감지되었다.


"불! 불났나 봐!"


맞은편 아파트 3층에서 불이난 것 같았다. 아니, 다시 한번 자세히 보니 아파트 정문(정확히는 변압기)에서 불이 났고 맞은편 아파트에 불길이 비치는 것이었다.


"연기 들어온다. 창문 닫아!"


불이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지?

주변에 불이 났음을 알리고, 119에 신고해야 한다.

소방차는 와 있는 것 같다. 바로 안방으로 달려갔다.


"엄마, 일어나세요. 불났어요!!"


엄마가 깜짝 놀라서 일어나셨다.

"불!! 불??!"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엄마께서 놀라시지 않도록 차분히 깨웠을 텐데 이미 내 심장은 벌컹벌컹 뛰고 있었다. 아기를 안고 있어서 어떻게 대피해야 하나 눈 앞이 캄캄했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일단 옷부터 입자. 애기도 옷 따뜻하게 입히고. 기저귀 가방 챙기고, 물 챙겨야 해. 오빠, 수건에 물 묻히고, 물통도 좀 챙겨줘!!"


신랑이 불이난 위치와 약간 거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벌건 하늘에 폭발음까지 들리니 혼비백산이었다. 신랑이 나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오겠다고 했지만 혼자 가서 위험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엄마께서 같이 가시면 나랑 아기만 집에 남으니 그것도 무서웠다.


"전기가 나갔어. 다행히 물은 나오는데, 경보음 하고 안내방송이 안 나오네. 일단 대피하자."


요즘 건조주의보가 내려서 불이 옮겨 붙으면 어쩌지? 주차장에도 연기가 가득하면 어떡해? 마음속에는 오만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집에서만 있을 수는 없었다. 엄마께서 옆집 문을 두드려서 불이 났음을 알리고, 아기를 안고 뱅글뱅글 계단을 내려가는데 차키를 안 가져온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러다가 다시 차키를 손 안에서 확인했다. 아기를 데리고 대피하다 보니 더 신경이 쓰이고, 정신이 없었다.


일층과 지하 주차장에 우리처럼 나와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회오리바람처럼 들리던 소리는 자가발전기 소리였다. 정전이 되어도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추지 않도록 자가발전기를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불을 진화 중이고, 차를 타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새벽 운동을 나가신 아빠가 연락두절이 된 것이다. 엄마께서는 불이 난 위치가 아빠께서 운동하시는 경로라고 하셨다. 드럼 연습실까지 걸어가서 드럼을 치고 오시니까 아빠를 데리러 가기로 했다. 가는 내내 여러 번 전화를 걸어도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차로 지나가면서 화재 위치를 확인해보니 남대전 변전소였다. 소방차들이 달라붙어 화재 진압 중이었는데 아빠는 도대체 어디 계신 걸까... 왜 전화를 못 받으시는 걸까... 걱정이 되었다.


우리 집은 정전이 되었으니 근처 사시는 할아버지 댁으로 가기로 했다. 할아버지께서도 새벽에 일어나셨을 텐데 연락을 받지 않으셨다. 도중에 아빠한테서 연락이 왔다. 우리의 카톡은 봤는데 전화는 한통도 안 와있었다고 한다. 드럼 연습실도 정전이 되어서 나와 보니 가오동에서 불이 난 것을 확인했고, 우리 아파트는 아니어서 놀랄까 봐 연락을 안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화재 진압 과정을 지켜보다가 카톡을 늦게 확인하셨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 속에서 연락이 안 닿았으니 걱정했던 마음만큼 원망의 목소리를 늘어놓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할아버지 댁으로 갔다. 할아버지께서도 갑자기 정전이 되어서 놀라신 모양이었다. 다행히 6시 30분경 전기가 돌아왔다. 정말이지 전기의 소중함도 다시 한번 느꼈다. 부산 여행을 갔던 언니한테서 '대전 변전소 큰 불.. 일대 광역 정전'이란 제목의 속보를 보았다는 연락이 왔다. 괜찮냐고... 우리는 괜찮다고, 할아버지 댁으로 피난을 왔다고 했다.


어느 정도 화재가 진압되고 상황을 보기 위해 동네를 한 바퀴 크게 돌았다. 변전소에서 화재가 크게 나고, 같은 라인에 있던 변압기들이 터져서 새까맣게 타 있었다. 주변에 있던 꽃들과 차들은 새까만 재가 묻어있었다. 아... 이 옆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내가 본 불은 아파트 정문에 설치되어있던 변압기 3개가 터지면서 아파트 창에 비쳤던 것이고, 변압기가 모여있어서 불이 꽤 크게 붙은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서 불이 옮겨 붙었으면 우리 아파트 동도 위험했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찔했다.


이만하길 참 다행이다. 정말이지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구나. 하루하루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낸다는 게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인 것 같다. 불이 나니까 생각보다 당황스럽구나. 아침에 본 벌건 하늘과 폭발음, 자가발전기 돌아가는 소리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았어. 뭔지 몰라도 토네이도가 다가온 느낌...? 부모가 되고 보니 아기에 대한 보호본능이 엄청 강하구나. 아빠 걱정은 또 얼마나 했던지... 가족은 정말 소중해. 불은 참 고맙고도 무서운 존재야. 이제 가스 새는 소리만 들려도 무서워. 많이 놀라긴 했었나 봐.  가정용 차량용 휴대용 소화기 확인해야겠다. 이번 화재로 인명피해가 없어서 다행이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 같아.


정말이지 많은 것을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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