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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댁 Apr 16. 2023

상담을 통해 알게 된 '나'

- '지영 님이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인가요?'

상담사 선생님께서 물으셨을 때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언제였더라? 회사에서는 대리로, 가정에서는 엄마이자 딸, 아내이자 며느리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온전히 '안지영'이었던 시간이... 출산 후에는 아이와 떨어져도 아무런 걱정 없이, 오롯이 나로 존재한 시간을 찾기는 어려운 것 같다. 아직은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그려진 순간이 있었다. 신혼여행 중에 호텔 창 밖으로 파란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던 시간이었다. 장거리 비행과 시차에 적응하느라 쉼이 필요했던 신랑은 하얀 이불 속에 들어가 쉬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찰나의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될 줄이야! 숙소 안이라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정적만 흘렀지만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맑았고, 그 경계를 그려주는 건 유유히 흘러가는 하얀 구름뿐이었다. 그 순간이 내 기억 속에서는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상담사 선생님께서 나에게 그러한 순간을 물은 건 트라우마 이후 마음이 편해지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나의 오른손은 내 왼편 가슴 위로, 나의 왼손은 내 오른편 옆구리 위로 올렸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나 자신을 살포시 안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독이면서...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이 추가되었다.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운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내게 아무런 역할도 기대하지 않고, 깊은 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요."

나는 오랜 친구를 떠올렸다. 요즘은 자주 만나지 못해 함께 있는 상황 속으로 빠르게 들어가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주는 친구의 얼굴 표정을 떠올려봤다. 

- "그 친구가 지영 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뭐라고 말했을 것 같나요?"

- "음... '너무 마음 쓰지 마.'라고 이야기해 줬을 것 같아요."

대답을 하면서 조금 울컥했다. 나 자신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디 내 마음이 힘들 정도로 그 기억을 마음 무겁게 지고 가지 않기를... 너무 마음 쓰지 않기를.


상담사 선생님께서는 트라우마 시 전달해야 할 교육이 있다고 하셨다. 회사에서 일어난 투신 사고 목격 후 그 장면이 반복해서 생각나는 건 '지금은 안전하다'는 것을 인지하기 위해 뇌가 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본 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왜?"라는 질문이 자꾸 떠오르는 건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나 나의 경우 이전에도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게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볼 때 '혹시 또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을 마음 한편에 갖고 있었다. 최근에 동료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나를 붙잡으며 본인이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힘든 감정을 토로했을 때, 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끝까지 함께 있어 줄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듣다가 미안하다며 꼭 안아주고 자리를 떠나면서도 혹시 저분도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쩌나 하고 나도 모르게 걱정을 했었다. 다시는 주변에 이런 사고가 없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다.


상담을 마치기 전 다음번 상담을 약속했다. 비대면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어 감사했다. 상담을 통해서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참 많다. 하나, 가끔은 혼자일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감정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챙기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갖기로 다짐했다. 둘, 17년 전 친구를 떠나보낼 때의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그래도 묻어두었을 뿐. 지금이라도 내 마음을 돌아보고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하다. 상담을 통해 내 마음을 챙기며 조금이나마 편안해지면 좋겠다. 셋, 나는 생각보다 오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상담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날씨와 분위기, 냄새와 들리던 것들을 생각보다 몸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은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지나갔던 건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한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걸 기억하고, 나아지게 하는 건 글쓰기 과정인 것 같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시간을 내어 글로 옮겨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나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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