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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댁 May 20. 2018

음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최인아책방 콘서트_피아니스트 이경숙 '내 인생의 음악과 책'

음악이라는 타임머신


음악은 향수와 같다. 지나가는 사람이 남긴 향기 속에서 같은 향수를 쓰던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음악도 특정한 장소와 시간으로 나를 데려다준다. 그래서 음악을 들을 때면 몸은 같은 자리에 있어도 기억 속 어딘가로 잠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최인아책방 콘서트에서 피아니스트 이경숙 교수님의 연주와 인생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 로즈가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것처럼, 교수님의 삶을 음악으로 나눈 시간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간 6.25사변부터 땀을 닦으며 힘차게 연주하시는 지금 이 시간까지  교수님 삶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였다.


바흐 인벤션 No1, No8


올해 만 74세이신 교수님께서는 6.25사변 때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어렵사리 피난 간 부산에서 텐트치고 개최된 제1회 이화경향콩쿠르에 참여하셨다. 그때 연주하신 곡이 바흐 인벤션 No1, No8였다.


'아, 이 곡!' 피아노 학원 앞을 지나가다가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귀에 익은 곡이다. 그 당시 신수정 교수님, 한동일 교수님과 함께 콩쿠르에 참가해 수상했으며, 지금도 친하게 지내며 인연을 이어오고 계시다고 한다.


'전쟁통에서 피아노를 배우셨다니 가능한 일일까?' 악보와 음반 한 장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어머니께서 성악을 전공하셔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 한다. 교수님께서는 "척박한 환경에서 어렵게 배운 피아노라서 끝까지 놓지 않을 수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께서는 그 당시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고, 교수님은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남겨졌다. 외국인 선교사가 소장했던 피아노를 어머니께 주고 갔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여자가 피아노를 치면 집안을 말아먹는다.'며 피아노를 줄로 꽁꽁 묶어두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아시는 피아노 선생님께 부탁하여 울산 할아버지 댁에서 몰래 빠져나와 서울에 있는 선생님 댁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피아노 명곡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반복하며 치는 것이 유일한 재미이자, 홀로 남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Op.57 열정 &

엘리제를 위하여


어머니와 헤어지고 6년 후, 미국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딸을 미국으로 초청하셨다. 파마 머리에 분홍색 나일롱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유독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입국 심사를 할때 여권에 등록된 생년월일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던 생년월일이 일치하지 않아 스파이로 의심을 받기도 하셨다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미국에서 피아노 선생님을 소개받아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Op.57 열정’ 연주를 선보였다. 선생님께서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해보라고 하셨고, ‘열정’을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인데 무시당한 것 같아 미친듯이 빠르게 쳐버리셨다. 결국 피아노 선생님은 이런 아이를 가르칠 수 없다며 거절하셨다고 한다.


다행히(?) 책방에서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천천히 정성스럽게 연주해주셨다.


쇼팽 즉흥환상곡


쇼팽 즉흥환상곡은 교수님의 18번이다. 남편 친구분들이 집에 왔을 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도 이 곡을 듣지 않으면 집에 갈 생각을 안하신다고... (하하)


작년에 회사에서 행사를 진행하면서 엄성일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자주 반복해서 듣던 곡이었다. 눈 앞에서 교수님 버전으로 들을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 여름밤의 꿈 같았던 영문학도 길


교수님께서도 잠시 피아노를 포기한 시간이 있었다. 미국에서 처음 만난 피아노 선생님께 퇴짜 맞고 체계적으로 피아노를 배우지 못한 것을 통탄하던 시절, 아는 언니가 팔에 책을 끼고 다니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피아노가 아닌 영문학을 전공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단다.


어머니께서 영문학 여름학기 수업에 등록해주셔서 가보니 막상 한페이지 넘기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더군다나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진행하는 여름학기 수업이라 진도는 더욱 빨랐다. 영문학도는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리한 어머니께서 교수님께 처음부터 상황 설명을 해두어서 청강으로 처리되고, 영문학도의 꿈은 해프닝으로 남았다고.


쇼팽 발라드 1번


음악 학교 입학 시험은 쇼팽의 빠른 곡과 느린 곡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곡 안에 빠르고, 느린 부분이 다 들어가 있으면 되는 줄 아시고 쇼팽 발라드 4번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잘못 준비한 줄도 모르고 의연하고 당당한 그녀에게 면접관들은 쇼팽 발라드 4개 곡을 쳐봤냐고 물었고, 3개를 쳐봤다고 대답하자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주해 보라고 하셔서 연주했던 곡이다.


쇼팽 발라드 1번을 쳐본 적은 있지만 연습한 곡이 아니라 당연히 떨어졌겠거니 생각했는데 한달 뒤 합격 소식이 전해졌다.


내가 이렇게 엉뚱한데가 있어.


교수님의 이야기에 빵 터지면서도 ‘어휴, 다행이다!’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교수님의 이야기가 남일 같지 않은 건 불쑥 튀어나오는 엉뚱함을 나도 많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꼼꼼히 하려고 노력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허당 안선생’이라는 것을 들키고만다. 아닌척 하려고 애쓰지만 엉뚱하고, 4차원 적인 모습을 감출 수 없나보다. (엉엉)


그런데 캘리그라피를 가르쳐주시는 일연 유현덕 선생님께서 허당이고, 빈틈 있는 모습이 지영씨 매력이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예쁘다고 말씀해주셨다. 글씨를 쓸 때도 예쁘게 꾸미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솔직담백하게 툭툭 내놓으라고 하셨다.


교수님이야말로 자신의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툭툭 내보여주시니까 인간적인 모습에 공감과 애정이 가는게 아닐까? 유현덕 선생님의 말씀이 저런 모습이구나 싶었다. 교수님의 연주 소리가 소녀처럼 맑은 느낌을 주는 비결은 자신의 모습을 꾸미려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스트 라캄파넬라


리스트 라캄파넬라는 선생님께서 손을 풀기 위해 연주하시는 곡이라고 하셨다. 트릴, 옥타브, 점프 등 피아노 연주에 필요한 기교들이 한 곡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연주가 시작되니까 ‘아하, 이 곡! CF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 중에는 어딘가에서 들어봐서 익숙한 곡들이 참 많다. 그런 곡들에 하나씩 이야기가 입혀지고, 감동을 받고, 즐겨듣게 되는 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다.


음악과 함께하는 삶


6.25전쟁 때 폭탄 소리를 재밌어하는 천진난만한 소녀 시절부터 지금까지 교수님의 삶을 음악으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중학생 때 현악반에서 연주했던 캐논과 바흐 미뉴에트를 최근 다시 연습하다 보면 함께 연습하던 친구들과 연습실 풍경, 연주할 때의 감정이 떠오르곤 한다.


교수님께서도 한 곡 한 곡 연주하실 때마다 그때의 순간을 조금씩 떠올려보시지 않으셨을까? 척박한 환경에서도 피아노를 아끼고, 사랑하며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사셨기에 6곡 모두 악보 없이 온 몸과 마음으로 연주하시는게 아닐까 싶다.


추천해주신 책 ‘안네의 일기’를 읽어보며 교수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려봐야지. 좋은 연주를 위해서 책, 특히 노래가 되는 시를 가까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기억해야겠다.


교수님처럼 일흔이 넘어서도 멋지게 연주할 수 있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첼로를 손에서 놓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긴 글을 마친다.



덧. 앵콜곡으로 송영민 피아니스트와 함께 연주하신 가베트 ‘철도’라는 곡이 재밌었다. 취향저격!

https://youtu.be/4ogyqKuss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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