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작가와 함께 동유럽 글쓰기 여행 Day3
-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상을 살아보는 것
- 나로 집중된 관점에서 벗어나 타인의 삶을 마음껏 관찰하는 시간이다.
둘다 ‘벗어난다’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익숙한 시간과 장소에서 벗어나 그 안의 나를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 때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돌아본다. 멍 때리는 시간은 곧 사색의 시간이다. 바로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멀리서 항공뷰로 바라보면 비로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떠나나보다.
나에게서 집중된 관점에서 벗어나 진짜 내 모습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는 시간... 여행을 통해 생각하는 시간을 벌고, 그 시간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폴란드에서 헝가리로 버스를 타고 7시간을 달렸다. 폴란드 국경을 넘어 슬로바키아, 또 한번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넘어왔다. 차창 밖 풍경은 평야에서 산으로, 다시 평지로 이어졌다.
폴란드에서는 파란하늘과 흰 구름, 빽빽하게 심어진 나무들 사이에 띄엄띄엄 자리한 집들이 보였다. 슬로바키아를 지날 때는 산맥이 끝없이 이어지고, 곳곳에 고성이 보이기도 했다. 안전모를 쓰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모습도 보였다. 자연 속에서 하이킹이나 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헝가리로 넘어왔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더니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진한 회색빛 구름이 흐르고 있었고, 청초한 반달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곽진언 버전으로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곳 무엇으로 채워 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가리
갈증이 나듯 듣고 싶었던 노래를 미루지 않고 찾아 들었다. 듣고 싶은 마음을 모른척 하지 않고 마음껏 노래를 듣는 것 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지기도 했다.
힘을 뺀 목소리로 관조하는 듯 전해지는 노랫말과 차분한 멜로디가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차창으로 비치는 내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뚱맞게 세상에 하나 뿐인 내동생이 생각났다.
동생은 가끔 내게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나는 나한테 한 번도 져준 적 없어.
동생에게 부모님처럼 이건 옳고, 저건 잘못됐다고 말하는 순간들이 차창에 비친 내 모습에 겹쳐졌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5살 어린 동생을 돌보면서 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해.”, “저건 그렇게 하면 안돼.”
동생도 이제 스무살이 훌쩍 넘은 성인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에 책임을 질 나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어린 아이를 대하듯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말하니, 자기 주관이 강해진 동생과 부딪치기도 했다.
동생을 위한 마음이라고 하지만, 정말 동생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오히려 동생에게 필요한 건 인정과 칭찬이 아니었을까? 실수하더라도 잘못을 다그치기 보다 한 발짝 뒤에서 기다려주는 여유가 필요한 건 아닐까? 다 알지만, 막상 부딪치면 반복되는 상황에 매번 좌절하고 만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건 이래야 해.’라는 나만의 공식이 깨지는 순간이 많다. ‘어라? 이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네!’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동생이 내가 했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을 보기 힘들어서 먼저 나서서 막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지나보니 그렇지 않더라.’라며 더 편안한 길을 알려주고 싶지만, 나 역시 실수와 좌절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허당기 가득한 건 동생보다 한 수 위다.
여행을 하면서 아주 사소한 것에 눈부시게 행복해지는 내 마음을 발견한다. 갑자기 많은 돈이 생겨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순히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듣고 싶었던 음악을 원하는 시간에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만큼 나에게 고마웠다.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모른 척 지나치던 내 마음에 귀 기울이고, 원하는대로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기다려주었다.
동생에게도 딱 이만큼의 여유와 기다림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이렇게 해야 해.’라는 말 대신 하고싶은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누나에게 고마워 할지도 모르겠다. 도움이 필요할 때 떠올리고, 고민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편안한 누나라면 충분한 것 같다.
이 글을 통해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내년에 아버지 환갑을 맞이하여 함께 유럽여행을 꼭 와야겠다. 그 동안 쑥스러워 말하지 못했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넓은 세상을 함께 구경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