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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_벗어나고 싶은 나

정여울 작가와 함께하는 동유럽 글쓰기 여행

by 이수댁
체코 프라하 블타바 강을 바라보며

체코~폴란드~헝가리~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다시, 체코

지난 7일간 5개의 국경을 넘었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남한으로 나뉜 대한민국에서는 평생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여권 검사 없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내게는 색다른 경험이다.

보이지 않는 선을 지나면 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이 달라진다. 헝가리에서 끝없이 이어지던 평원을 바라보았는데, 슬로바키아로 넘어오니 산악지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안전모를 쓰고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모습도 보인다. 생활 속에서 산악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열아홉에서 스무살로 넘어가는 시점은 내게 하나의 국경을 넘는 일과 같았다. 스무살 대학생이 되니 음주도, 운전도, 연애도 ok! 일년 전 안 되는 일들이 한 살 더 먹고나니 허용되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쓰윽 건너 온 듯한 기분이었다. 해외여행을 온 듯이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스물아홉, 서른. 또 한번의 국경을 넘어가는 일. 내 인생은 괜찮을까? ‘나이 한 살 먹는다고 갑작스럽게 사람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뭘...’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문득 불안감에 휩싸이곤 한다.

여행을 오기 전 많은 부분을 걱정했었다. ‘가도 괜찮을까? 여행 비용은? 시간은? 함께 가는 사람들은?’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미지의 것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막상 와보니 수많은 걱정이 무색하다 못해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라는 생각이 든다.

매일 국경을 넘나 들며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새로운 것을 느낀 일주일이었다. 그 안에서 새로이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생각에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벗어나고 싶은 지난 날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술을 즐겼다. 그래봐야 고작 한 잔이다. 술을 좋아하긴 해도 몸에서 잘 받지 않아서 얼굴이 금세 붉어지곤 한다. 서울에 있을 때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변명 1호이기도 했다. 얼굴이 빨개지는게 부끄러웠다. 본의 아니게 나를 들키는 듯한 기분이었다.

종종 질문을 받는다. 주량이 어떻게 되냐고. 사실 나는 주량을 잘 모른다. 그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많이 마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취할 정도로 마셔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게 싫었다. 뜨거운 여름밤이면 냉장고에 와인과 맥주를 채워두고 한 잔씩 홀짝이며 혼자서 소소하게 즐기는게 더 좋았다.

서울에서 혼자 지내면서 긴장 푸는 법을 잘 몰랐다. 정신줄 놓고 술에 취해 집도 못 찾아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언제나 적당히, 분위기에 맞출 정도로만 술을 입에 대고 내려놓았다. 도시에서 여자 혼자 사는 일은 그다지 만만치 않다고 여기며...

술 뿐만이 아니었다. 잠도 늘 부족했다. 주말에도 늦잠도, 낮잠도 자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새벽 5시 반쯤 눈이 떠지면 몸을 일으켰다. 주말도 알차게 보내고 싶은 강박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시간은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새벽에 일어나 청소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아침 7시, 겨울이면 해가 뜨기도 전에 영문기사를 읽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늘 그렇게 정신차리고 열심히 사는게 힘들지 않은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내 시간을 자갈로 쪼개 사용한다면 모래나 진흙으로 시간을 쪼개 쓰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숨 가쁘게 느껴지면서도 익숙한 일상이었다. 열심은 습관이었다. 치열하게 달려온 20대, 오히려 그런 내 인생을 즐겼다.

주말에는 자주 가족들이 살고 있는 대전으로 갔다. 대전에서는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전에 가면 특별히 약속을 잡지 않고 집에 있는다. 가족들은 토요일에 일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취미를 즐기러 밖으로 나간다. 그래서 결국 서울과 다를 바 없이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도 넓은 공간에서, 집밥을 먹는게 내겐 쉼이었다. 일찍 눈을 뜨면 엄마께서 이마를 뒤로 젖히며 더 자라고 말씀하셨다. 충분히 잘 수 있도록 방문을 닫고 소리를 낮추고 아침을 준비해주셨다. 목 부분이 늘어진, 오래되었지만 편안한 잠옷처럼 고향에서만큼은 긴장을 늦추고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그런 충전의 시간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2주에 한번 꼴로 자주 대전집을 찾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좀더 잘 쉬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귀국 다음 날부터 출근을 해야하고, 반나절 지나면 익숙한 패턴으로 돌아가고 여행의 기억은 까마득해지겠지만, 가끔씩 여행 중에 끄적거린 글들을 보면서 여행할 때의 마음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눈 앞에 보이는 것에 환호를 내지르고, 마음껏 설레어하고, 충분히 사색하고, 피곤하면 미루지 않고 잠들던 내 모습을.

그리고 일상 속에서 작은 여행의 기쁨을 만끽하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좋아하는 음악회과 미술관 찾아가기, 책방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며 책 읽고 사색하기, 커피 한잔과 즐기는 친구들과의 수다, 공원 벤치에 앉아 햇살을 만끽하며 아이스크림 먹기 등 잠시 멈춰서 일상에 쉼표를 찍는 순간들을 더 자주 즐겨야겠다. 꼭 뭘 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가끔은 이불 안에 돌돌 말아 김밥 놀이를 하며 무료한 시간도 가져야겠다.

벗어나고 싶은 내 모습은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마음까지 편히 쉬지 못하는 내 모습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해결책은 일상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일상에 더 녹아드는 것이었다. 긴장을 풀고 자연스러운 내 모습에 빠지는 것이었다.


여행을 하며 바라본 새로운 시간들이 이곳에 사는 현지인들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듯이, 내 일상에서도 작은 기쁨들을 찾아 여행을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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