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읽고~

by 이수댁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뒤늦게, 너무나도 재밌게 보았다. 언니가 몇 번이고 추천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푹 빠지게 되었다. 갓 서른을 넘긴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하나하나 살아있고, 대사도 너무나 찰졌다. 아무래도 비슷한 나이 때의 이야기다 보니 공감을 많이 할 수밖에. 서른 초반은 아직 무엇을 시작해도 좋을 나이기도 하면서 약간의 노련함이 더해져 참 멋진 나이라고 느꼈다.

드라마 속 뼈 때리는 대사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찾았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신 서점에서 맥을 같이 하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바로 이도우 작가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라는 장편소설이다. 장르는 멜로, 서른 초반의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올해 초 jtbc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니 잘 만났구나 싶었다. 소설은 또 어떻게 드라마로 만들어졌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소설과 드라마 속에서 마음을 파고드는 대사나 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참 즐겁다. 멜로 장르에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두고두고 생각하게 되는 인생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한동안 소설을 멀리하다가 다시 좋아하게 된 이유도 이와 같다. 작가의 생각, 감성, 삶의 조각들이 포개져 만든 또 하나의 세계에 초대받은 느낌. 나도 그런 세계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동경을 갖게 된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 은섭은 강원도 혜천읍 북현리라는 시골에서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책방지기이다. 고등학교 동창 해원이 서울에서 미대 입시학원 강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겨울 동안 고향을 찾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가 책방 판타지를 모락모락 키운 경험이 있어 책방이란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 산골마을, 겨울, 눈, 책방, 북클럽, 남자와 여자,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키워드로 잔잔하고도 따뜻한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읽어보시길. 남자의 책방 일지에 입고 서적(작가가 그런 책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었으리라 상상한 독립 서적)과 함께 서정적으로 그려진 해원과의 사랑스러운 일상이 신선하고 재밌다.


덧. 책방 일지든, 어떤 장르든 글을 쓰는 남자, 너무 멋지지 않나요?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된 재밌는 단어

1. 귤락: 귤에 붙은 실 같은 거

2. 나뭇잎 소설: 영미권에서는 쇼트쇼트 스토리라고도 부르는 장르


#기억에 남는 구절

p303. 여하튼 나뭇잎 소설이란 표현은 언제 들어도 어여쁘다. 작은 단풍잎에 쓸 수 있는 글자 수와, 넓은 연잎에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현저히 다른 텐데. 문득 이파리에 글을 쓰는 과거 시험을 상상해본다. 도포 자락 휘날리며 모여든 응시생들이 징 소리와 더불어 나뭇잎을 주우러 달려가는 장면부터. 어디에 써도 나뭇잎 글이겠지만, 굳이 옷자락을 적시며 철벅철벅 연못에 들어가 연잎을 따 오는 누군가를 그린다. (괜히 웃게 됨.)


... 요즘의 나는 사랑을 하면서 무엇인가를 얻었고, 또 무엇인가를 잃었다. 잃었음을 알고 있는데, 새로 얻은 게 좋아서 무엇을 잃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p338. 해원은 새삼 공감해버렸다. 결국은 친절한 이들이 좋았고, 다정한 사람들과 더불어 잘 지내고 싶었다. 그 말대로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들을 곁에 남겨가면서.


p382. “내가 가장 두려운 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거나 실패하는 게 아니야. 농담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게 제일 두려워.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농담이 안 나와서 그래. 너를 웃겨줄 말이 생각이 안 나서.”


p388. 한때는 살아가는 일이 자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평화롭게 안착할 세상의 어느 한 지점. 내가 단추라면 딸깍 하고 끼워질 제자리를 찾고 싶었다. 내가 존재해도 괜찮은, 누구도 방해하고 방해도 받지 않는, 어쩌면 거부당하지 않을 곳.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디든 내가 머무는 곳이 내 자리라는 것.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스스로가 하나의 공간과 위치가 된다는 것. 내가 존재하는 곳이 바로 제자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가끔은, 그 마음이 흔들리곤 하지만.


p391. 어쩌면 세상의 모든 장소들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낯선 장소에 낮에 도착하는 것과 밤에 도착하는 건 너무나 다른 여행의 시작이라는 걸.


p400. 인생의 고통이 책을 읽는다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다 소용없는 건 아닐 거라고.... 고통을 낫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은 늘 거기 있고, 다만 거기 있음을 같이 안다고 말해주기 위해 사람들은 책을 읽고 위로를 전하는지도 몰랐다.


p404. ‘우리 매니저님, 잘 지내지? 좋은 일들만 있기를 기원해. 살면서 교훈 같은 거 안 얻어도 되니까. 좀 슬프잖아. 교훈이 슬픈 게 아니라 그걸 얻게 되는 과정이. 슬픔만 한 거름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건 기왕 슬펐으니 거름 삼자고 위안하는 거고... 처음부터 그냥 슬프지 않은 게 좋아. 물론 바라는 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만.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네. 늘 그리워요.’


p407. 왠지 뭉클해져서 해원은 가만히 책방 홈피를 닫았다. 알고 보면 사람들은 참 이상하고도 신기한 존재였다. 꽃은 타고난 대로 피어나고 질뿐인데 그걸 몹시 사랑하고 예뻐하고... 꽃말까지 지어 붙인다. 의미를 담아 주고받으며,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기도 한다. 꽃들은 무심하고, 의미는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계절 따라 피었다 지고 사람들만 울고 웃는다. 어느새 봄기운이 완연했다.


p422. 밤새 사랑하는 사람의 팔을 베고 깊은 잠을 잤다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과연 그 자세가 밤의 연인들의 정석이겠구나,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들에게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그들도 팔이 저렸을 터인데. 그리고 누군가의 팔을 베고 잔다는 건 생각보다 그렇게 편안하지 않습니다. 솜털 베개가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