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CDRI(기업분쟁연구소) 랩소디
글을 시작하며
법률사무소를 배경으로 시트콤 연작소설 형태의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모 출판사로부터 받은 뒤,
할까 말까 고민하다 일단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두 권의 에세이집을 세상에 내놓은 바 있는데, 아무래도 에세이는 Fact에 근거하다보니 소재의 선택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놓고 픽션임을 표방할 수 있으니 훨씬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연작소설 제목은 '마 논 트로포'(ma non troppo)입니다.
악상(樂想)을 지시하는 용어 중 하나인 ‘마 논 트로포’는 이태리어로서 그 의미는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입니다.
[예]
“Allegro ma non troppo -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Appassionato ma non troppo - 격정적으로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Giocoso ma non troppo - 익살스럽게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
이렇듯 '마 논 트로포'는 무언가 기본 개념을 전제한 다음 이를 중화시켜서 밸런스를 맞추게 하라는 하나의 장치 개념인데, 그 의미가 좋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이번에 소설 제목으로 낙점했습니다.
부제는 'CDRI 랩소디'입니다. CDRI는 제가 운영하는 로펌인 기업분쟁연구소의 영문명입니다(Corporate Dispute Research Institute).
제가 운영하는 로펌 CDRI(기업분쟁연구소)를 무대로, 다양한 사건에 연루된 여러 인간군상들을 다뤄보겠습니다. 출판사 측의 압박이 계속되는 한 집필은 계속되겠지요.
유갈량 변호사는 엄지손가락으로 오른 쪽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슬쩍 곁눈질 해보니 대표인 최무열 변호사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인 소개로 CDRI(기업분쟁연구소)를 찾아왔다는 의뢰인.
대기업 K사를 상대로 100억 원 대의 손해배상을 청구해 달라는 건이었다. 의뢰인이 손해배상액수를 말할 때만 해도 최변호사, 유변호사 모두 '에고. 괜히 시간낭비만 하겠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차분히 의뢰인의 얘기를 들어보니 전혀 허황된 사건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의뢰인은 자신의 비즈니스 모델을 몇 개 기업에 소개했는데, 그 중 한 외국기업(T사)이 투자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때 국내 대기업 K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자신들에게 이 사업 운영 독점권을 주면 T사 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투자하겠다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의뢰인은 T사와의 투자협의를 포기하고 K사와 투자유치를 위한 실무적인 협의를 진행했다. 그런데 K사가 의뢰인의 비즈니스 모델을 심층 검토해 보니 그 모델은 신규성이나 진보성이 없어 특허받기가 힘들며, 얼마든지 시장에서 변형 서비스 모델이 가능하다는 자체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결국 K사는 의뢰인과의 투자협의를 중단했다.
의뢰인은 K사 때문에 T사로부터 투자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리게 된 것인데, 만약 T사로부터 제때 투자를 받았다면 바로 생산에 돌입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으므로 그에 따른 기회비용까지 생각해서 손해배상으로 최소한 100억 원을 청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단, 의뢰인은 CDRI에 사건을 맡기는 데 조건이 있었다.
당장 돈이 없어 인지대와 착수금을 낼 수 없으니
착수금은 면제해 주고 인지대도 CDRI가 부담해 주면
나중에 K사로부터 손해배상금을 받아
그 중 20%를 사례금으로 주겠다는 것.
의뢰인 말대로 100억 원의 손해배상을 받게 되면 사례금이 20억? 그러면 정말 잭팟인데...
하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진짜 외국기업 T사가 의뢰인에게 투자 관심을 보인 것인지.
만약 K사가 이니었다면 T사로부터 확실히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을지.
K사가 처음에 어느 정도로 투자에 대한 확언을 했던 것인지,
K사가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 과연 K사의 귀책사유라고 할 수 있을지,
그리고 무엇보다 의뢰인이 주장하는 그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을지.
솔직히 손해배상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여러개였다.
그런데 인지대와 착수금까지 법률사무소가 부담하라니...
최대표 변호사는 예의 사람좋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네. 사장님. 정말 속이 상하셨겠습니다. 많이 억울한 사건이네요. 저희들에게 하루 정도 시간 여유를 주시죠. 검토한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뭐. 저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 yes든 no든 바로 말씀주세요. 제가 소개 받은 다른 곳도 있으니..."
살짝 자극하는 발언에 유갈량 변호사 눈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최대표 변호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의뢰인을 엘리베이터까지 모셨다.
"느낌이 어떠노? 유변?"
"예, 대표님. 솔직히 별로입니다."
"그래? 좀 리스크가 있긴 한데... 한번 부딪혀 볼까 싶기도 하고. 미스터 왕필에게 한번 물어볼게"
최대표 변호사는 유변호사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혼자 고문실로 향했다.
(2회로 이어집니다)
2회 보기 : https://brunch.co.kr/@brunchflgu/1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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