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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Apr 11. 2017

지적장애인 통장 지키기 대작전

김예원 변호사의 Law Essay

글쓴이 : 김예원 변호사     

장애인권법센터 대표/변호사. 사법연수원을 41기로 수료한 후 법무법인 태평양이 설립한 공익재단법인 동천 소속 공익변호사를 거쳐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에서 상임변호사로 일했다. 6년간 심각한 장애인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를 구조하고 대리하였고, 장애인 인권 관련 공익소송을 기획하여 수행하였다. 현재 다양한 장애인 차별과 인권침해 사례를 법률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한 장애인 인권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인권교육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장애인 인권 관련 제도와 정책 개선을 위한 매뉴얼, 연구, 논문을 지속적으로 집필, 발표하고 있다.


장애인 거주시설 인권침해 조사를 가는 길에, 공교롭게도 다른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변호사님 큰일났어요. 저희 시설에 살고 있는 민규를 갑자기 부모님이 데리고 가신다고 하는데, 가면 안될 것 같아서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도 모르게 약간 삐딱해졌다. 

“장애인이 자기 의지로 탈시설하여 지역사회에 사는 일은 좋은 것인데, 무슨 이유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시는 건가요?”

그랬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민규가 집에 가면 지금 통장에 있는 거금이 모두 없어질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학대를 받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사안이 심각한 것 같아서 오랜 시간 통화를 하면서 자세히 물었다.



상황을 정리하면 이랬다. 민규씨는 올해 25세가 된 청년이다. 


자폐성장애 1급으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민규씨가 시설에 살게 된지는 10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시설에 온 사연이 정말 가슴 아팠다. 민규씨의 친엄마는 지적장애인인데 민규씨의 친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한 남자와 동거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민규가 이제 막 10살이 지났을 때 그 친모의 동거남로부터 폭력과 성학대가 여러 번 있었어요. 우연히 학교 선생님에게 성학대 정황이 발견되어서 바로 분리되었거든요. 그 남자는 구속되어서 몇 년을 감옥에서 지냈다고 하더라고요.”


판결문을 읽어보니 범죄사실이 심각했다. 그 일로 민규씨는 심리치료 뿐 아니라 성학대로 인한 상해를 수술해야 했었다. 며칠 후 민규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다른 자료들도 검토해보니 시설에서 알려준 내용들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왜 가해자는 갑자기 민규씨를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일까?




“민규가 작년에 시설 옥상에 올라갔다가 실수로 떨어졌어요. 온 몸을 크게 다쳐서 큰 수술도 여러 번 하고 입원을 거의 1년 가까이 했었죠. 저희 시설에서 가입해 놓은 안전사고 보험금이 1억원이 넘게 나왔고 지금 민규의 수급비 통장에 입금되어 있어요. 그 소식을 들은 가해자가 매일 민규를 데리고 가겠다고 찾아오고 있어요.”




민규씨는 가해자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엄마와 살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큰 상태인데 가해자는 매일 그 엄마를 함께 데리고 와서 ‘자기를 따라나서면 이 엄마와 살게 해주겠다’고 하는 중이다. 물론 시설 퇴소 이후에는 자신이 민규씨의 통장을 관리하겠다고 한다.


반드시 막아야만 하는 현실이지만 법은 생각보다 무력했다. 사회복지사업법상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이 본인의 의사로 퇴소를 요구하면 시설은 그 퇴소절차를 거절할 수 없다. 

퇴소 후에 장애인이 자의로 자신의 통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도 법적으로는 일단 유효하다. 만19세가 넘은 민규씨에게 별도의 후견인 선임결정이 없는 이상 민규씨는 이른바 ‘행위능력자’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쥐어짜고 법률을 뒤적이다보니 2015년 말부터 시행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떠올랐다. 그 법에는 발달장애인의 계좌를 관리할 수 있는 ‘계좌관리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이라도 원칙은 스스로 자신의 계좌를 관리해야 한다. 스스로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때는 가족 등 보호자가 계좌관리인이 된다. 그런 보호자가 ‘없는’ 경우에만 지방자치단체장이 지정하는 사람이 계좌관리인이 될 수 있었다.



이 틈새를 파고들어 바로 구청에 전화를 걸었다.


“민규씨는 어머니가 지적장애인이시고, 의붓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자는 민규씨에게 심각한 학대를 가한 가해자로 형사처벌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이럴 경우는 발달장애인법상 보호자가 ‘없는’ 경우에 해당 되는 것으로 봐서 구청의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이 계좌관리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구청의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변호사님, 저희도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되나, 생물학적인 어머니와 호적상의 아버지가 있는 이 상황을 ‘보호자가 없는’경우로 해석하는 것은 어렵죠. 법률 해석을 저희가 그렇게 내리는 것을 부담스러워요. 선례도 없는 사안이고요.” 


그렇다고 좌절만 하고 있기에는 사안이 긴박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민규씨가 퇴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법무법인 태평양과 함께 이 법률의 소관부처인 보건복지부에 ‘법령해석에 관한 질의서’를 작성하여 공문으로 보냈다. 


“이 사례의 당사자인 발달장애인 박00의 권익을 실질적으로 옹호하고, 발달장애인법 본래 입법 취지를 구현하기 위하여는, 이 사례에 발달장애인법 제21조 제2항의 ‘보호자가 없는 때’ 규정을 적용하는 합목적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하루하루가 노심초사였다. 드디어 보건복지부의 공문이 도착했다. 유권해석 질의서에 대한 회신서였다.


“발달장애인의 권리인 ‘계좌관리 등’을 보호자가 대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 보호자가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적절한 행위를 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인정함이 입법취지를 고려할 때 타당하므로, 지적장애로 스스로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충분하지 아니하다고 판단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친모가 박00씨의 보호자가 되기는 사실상 어려운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박00의 의붓아버지는 친모의 배우자로서 민법 등에 따라 친모의 계좌관리인이 될 여지는 있는 것으로 사료되지만, 자동적으로 박00씨의 보호자 지위가 당연 승계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안의 경우 박00씨는 보호자가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질의서에 담았던 대부분의 내용이 모두 인정된 회신서를 받고 바로 민규씨가 있는 시설에 연락을 했다. 그 다음에는 구청에서도 일사천리였다. 지금 민규씨는 별도의 성년후견선임 없이 이 계좌에 대한 계좌관리인으로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의 지원을 받고 있다. 법률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권과 안전한 계좌관리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는 것에 더욱 기뻤다.


내 계좌의 돈을 지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발달장애인에게는 여러 제도를 굽이굽이 넘어야 하는 이토록 힘든 일이라니.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마음껏 삶의 선택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시설이든 가정이든 지역사회든 그 사는 곳이 어디인지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일반적 행동자유권과 자기결정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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