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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May 20. 2017

팟캐스트 인생내공-인내심시리즈(4) 구우일모

팟캐스트 - 조우성변호사의 인생내공

팟캐스트 인생내공-인내심시리즈(4) 구우일모


사마천의 인생을 들여보다


한나라는 항상 북방의 흉노와 갈등관계 아래 있었다. 한 무제 이전의 한나라는 흉노를 달래가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무제가 집권한 이후 이릉 장군의 주도 하에 대대적인 흉노 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릉 장군의 5천명의 결사대는 적진 깊숙한 곳에서 고립이 되고 만다. 당시 흉노의 군사는 3만명에 이르렀다. 결국 이릉 장군을 포함한 400명이 흉노족에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결사항전을 했음에도 죽지 않고 항복한 이릉장군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사마천만은 이릉 장군을 변호했다. 사마천은 전쟁에서 패한 것이 이릉 장군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한나라 군대의 작전 실패 때문이었고, 작전 실패의 대표적 원인은 이광리 장군을 비롯한 장군들 간의 알력 때문이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광리 장군은 한 무제가 가장 사랑했던 애첩의 오라비였기 때문에 사마천은 결국 한 무제에게 미움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을 면하기 위한 2가지 방법이 존재했다. 내 목숨 값으로 50만 전을 내거나(속전), 궁형(거세를 당하는 형)을 당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마천을 위해 돈을 내줄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사마천은 사형을 면하기 위해 결국 궁형이라는 수치스런 형벌을 받게 된다. 사마천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당시의 지사(志士)라면 당연히 사형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세상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할 것을 예견하면서도 치욕적인 궁형을 택했다. 당시 사마천의 나이는 49세였다. 

사마천은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착잡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나쁜 말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사마천은 헛된 죽음을 경멸했다. 사마천은 ‘아홉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과 다름없는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전자보다 후자를 택했다

사마천은 굉장한 효자였다. 사마천의 집안은 대대로 역사서를 쓰는 집안이었다. 당시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시 '이 역사서를 완성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사기(史記)》를 집필 중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사기》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궁형의 치욕으로 이미 육신은 죽었지만, 정신만은 오롯이 살아서 130여권, 52만 6천 5백자에 달하는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완성(B.C. 97)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궁형은 사마천의 세계관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전만 하더라도 <사기>에는 한나라에 대한 찬양의 글들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궁형이라는 크나큰 고통을 인생에서 겪은 뒤부터, 사마천은 한나라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의 글들을 많이 담으면서도 동시에 힘든 시기를 어렵게 이겨냈던 여러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담긴 글들이 써내려갔다.


사마천은 치욕을 참으면서도 다시금 재기한 ‘계포’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현명한 사람은 진실로 자신의 죽음을 소중히 여긴다' (현자성중기사賢者誠重其死)는 말을 남긴다. 


팟캐스트 듣기

http://www.podbbang.com/ch/12612?e=22144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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