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사람이 앉기 위한 목적’에 부합되게 잘 만들어지면 그것은 ‘의자’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이 때 ‘사람이 앉기 위한 목적’을 ‘본질’. 실제 만들어진 ‘의자’를 ‘실존’이라 보았다.
# 2
하지만 샤르트르는 인간만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각 인간마다 규정지을 ‘본질’이 없다. 인간은 세상에 그냥 던져져 있을 뿐이다.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 극단적인 허무를 깨닫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펼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원래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나를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짐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갈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3
그냥 인간도 개개인의 본질이 딱 정해졌으면 오히려 편할 수 있다.
‘넌 말야, 공무원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전 배우기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요.”
이런 언급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나는 내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규정하고 발전해 갈 수 있다는 의미.
한편으로 이러한 자유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자유로운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기에 늘 고민과 불안에 싸여 있다.
진정한 인간,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다른 것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주변과 상황을 핑계 대지 않고 항상 주체적으로 살기에 긍정적이며 도전적이다. 진정한 인간 실존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 4
공자가 군자를 일컬어 ‘일정한 형태의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군자불기(君子不器)’를 강조했다.
군자는 그 자체로 목적이면서 다양한 형태로 쓰임새가 있어야지
어느 한정된 하나의 쓰임새(본질)로 남으면 안 된다는 의미.
공자의 ‘군자불기’와 샤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