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리처드 칼슨)라는 책이 있다.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제목만 듣고서도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 우리는 큰 일 보다 사소한 일 때문에 다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고마워하기도 한다.
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덕목이 바로 ‘디테일’이다. 화통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보다 세밀하게 관찰하고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 그 예민함이 관계에서는 더 빛을 발휘한다.
왜 우리는 큰 일보다 작은 일에 더 민감할까? 큰 일보다 더 임팩트도 적을텐데 말이다. 그건 아마도 감정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일 것이다. 큰 일은 큰 일이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데 반해 작은 일은 작다고 생각하기에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리분별을 따지기 보다는 날 것의 감정이 먼저 반응한다.
2.
마음속 깊이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리고는 왜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좋게 생각하는지도 생각해 보자.
반대로 내 마음속에 안좋게 남아 있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아울러 왜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나쁘게 여기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의외로 그 사람들과 큰 일로 엮여 있기 보다는 아주 사소한 일들로 인해 좋은 감정, 나쁜 감정이 축적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절대 큰 일이 아닌데도. 내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인가 자책하면서도, ‘원래 사람은 그런 거야’라며 스스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3.
중국 고전 '전국책(戰國策)'의 중산(中山) 편에 나오는 고사 한 대목을 살펴보자.
전국시대 중산군(中山君)이라는 왕이 가신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이 때 '사마자기(司馬子期)'라는 사람도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여러 가지 음식이 오간 후에 양고기 국을 먹을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국물을 나누는 과정에서 배분 계산을 잘못해서 사마자기에게는 몫이 돌아가지 않았다.
사소한 실수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사마자기는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하고는 아주 불쾌해했다. 결국 사마지기는 중산군을 버리고 이웃나라인 초(楚)나라로 가서 벼슬을 했다.
사마자기는 초나라 왕에게 신임을 얻은 후에 평소 앙갚음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중산군을 공격하도록 초나라 왕을 부추겼다. 결국 초나라 왕은 사마자기의 진언을 받아들여 중산군을 공격하게 했다. 사마지기가 그러한 사소한 일에 앙심을 품고 초나라 왕을 부추겨 자신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중산군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초나라의 갑작스런 공격에 중산군은 크게 패배하고 측근 몇 명의 호위를 받으며 도망치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 추격을 계속하는 초나라 군사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중산군. 그런데 그 와중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젊은 형제 두사람이 목숨을 걸고 창을 들고 초나라 군사들과 싸우며 중산군을 지켜주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중산군이 위기를 넘긴 후 고맙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서, 그 두 형제에게 자신을 구해준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대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구해주었는가.”
그러자 그 형제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희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저희 아버님이 배가 고파 길에 쓰러져 있을 때 왕께서 우연히 이를 보시고는 친히 찬밥 한 덩이를 주셨습니다. 아버님은 그 찬 밥 한덩이로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저희들에게 남긴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왕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이 은혜를 갚으라구요"
이 말을 들은 중산군은 하늘을 보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타인에게 베푼다는 것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구나. 상대방이 정말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의 원한을 사는 것 역시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구나.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한 그릇의 양고기 국물로 나라를 잃었고, 한 덩이의 찬밥으로 목숨을 구하였구나.:
4.
‘남에게 베풀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정말 어려울 때 돕는다는 점이다. 상대방이 가장 어려울 때(when),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것(what)을 제공해 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미다. 상대방이 어렵지 않을 때는 웬만한 것을 주어본들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기 어렵다. 하지만 상대방이 어려운 상황일 때는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본적인 내용만 충족이 되어도 상대방은 큰 도움을 받았다고 느낀다. 상대방이 지금 어려운지, 그리고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짚어낼 수 있기 위해서는 상당히 예민하고 디테일해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잘 저지르는 오류는 도움을 준다고 하면서도, 상대가 아니라 내 기준으로 내가 도움을 주고 싶을 때(when), 내가 주고 싶어 하는 것(what)을 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필요와 감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이런 적선은 때로는 진정한 베품이 아니라 폭력 내지는 강요가 될 수 있다.
중산군은 과거 그 형제의 아버지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을 주었던 것이고, 이것이 그 사람에게 감동으로 남은 것이었다. 진정한 고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가장 필요한 것을 그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주는가(how)도 고민을 할 것이다. 도움을 주면서도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그 형식과 방법을 배려하는 마음가짐.
5.
반대로 언제 상대방의 원한을 사게 되는가? 중산군은 말한다. ‘큰 잘못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 상대의 원한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 다르다. 나는 별스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큰 수치심으로 작용하는 일도 많다. 이렇게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데 무슨 수로 다 맞춘단 말인가 라고 볼멘 소리를 할 수도 있다.
중산군의 경우 억울할 수도 있겠다. 기껏 좋은 마음으로 가신들을 불러서 대접을 하는데, 사소한 양고기 국물 한 그릇을 주지 못했다고 해서 사마자기가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관점을 달리 해보자. 사마자기는 수많은 가신 중의 한 명이다. 왕은 자신이 평등하게 사랑을 베푼다고 생각하지만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왕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오늘 내게 왜 이런 표정을 보이시지?’, ‘왜 오늘 회의 석상에서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신 거지? 뭔가 마음에 안드시는건가?’ 특히 인정욕구가 높고, 본인의 자리에 위기감을 느끼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사마자기 입장에서는, 양고기 국을 배분하는 일은 전체 잔치에서 그리 큰 일이 아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이런 사소한 일에서조차 내가 대우받지 못하는데 하물며 정작 큰 일에서 내가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겠는가 라는 허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또는 위 고사에서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사마자기는 이번 일 이전에 한 두 번 이와 비슷하게 본인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아 자격지심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양고기 국 사태로 촉발(트리거)이 된 것알 수도 있다.
6.
이렇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중산군도 이해가 가고 사마자기도 이해가 간다. 이래서 관계라는 것이 어렵다. 양쪽 다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중산군은 사마자기가 느꼈을 모멸감을 짐작할 줄 알아야 하고, 사마자기로서도 중산군의 진심은 그렇지 않은 데 여러 사정이 겹쳐서 사소한 실수가 발생한 것이라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관계는 사소한 것에 좌우되고 미묘한 감정 때문에 파국을 맞기도 한다.
-f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