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게 하는 문구(4) 금의야행
#1
김 대표는 어릴 때부터 인정욕구에 목말랐다. 상대적으로 공부를 훨씬 잘하는 형은 S대에 입학했지만 본인은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바로 군대에 다녀왔다. 돈을 버는 재주가 있어서 일찌감치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형님편. 명절이면 김 대표는 많은 돈을 집에 가져다준다. 하지만 부모님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형님을 더 인정해 준다.
#2
김 대표는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어서 열심히 일했다. 그 덕에 자신이 시작했던 개인사업을 탄탄한 규모의 중소기업까지 성장시켰다. 형은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김 대표는 형에게도 생활비를 보내 준다. 돈을 보낼 때마다 묘한 승리감을 맛본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김 대표의 사업 내용을 잘 모르기도 하고, 속속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못내 속상했고 항상 아쉬운 부분이란다. 마음속에 항상 갈증이 있다는 김 대표.
#3
‘인정투쟁(Anerkennungskampf)’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든 타인이 나를 자립적인 가치로 인정해 주기를 바라며,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를 획득하기 위해서 투쟁도 불사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이 이론은 헤겔로부터 비롯되었고, 후에 악셀 호네트에 의해 더 정교하게 정립되었다.
호네트에 의하면,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나 명예를 존중받고, 그를 통해 떳떳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고 한다. 이런 내밀한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상실감, 결핍, 수치심, 굴욕감 등을 느낀다. 그래서 해고당한 노동자를 괴롭히는 것은 경제적 상실보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굴욕과 분노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사회적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4
초한쟁패,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두고 싸우던 그 시절.
진나라 멸망 후 항우는 공이 있는 군벌들과 측근들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이 때 자신도 어디를 영토로 삼을지 고민했는데, 유생 한생이 유방과 다른 제후들을 견제하면서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머무르면서 세력을 기르자고 했지만 항우는 반대했다.
그는 황폐한 함양 지방이 싫었고, 무엇보다 고향인 초나라로 돌아가 고향 사람들에게 공적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귀해졌는데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錦衣夜行 ; 금의야행)이나 다름없소.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소?
<출전 : 사기, 항우본기>
이는 항우의 전략적 식견이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함양이 자리잡은 관중 평야를 둘러싼 하수와 진령산맥은 천혜의 요새였고, 두 자연 요소가 만나는 함곡관만 틀어막아버리면 외부 세력이 관중 안으로 진격하는 것은 당시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길 포기하고 당시로서는 깡촌 중에도 깡촌이던 초나라로 돌아간 것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실책이었다.
#5
통상 금의야행(錦衣夜行)은 의미 없고 보람 없는 행동을 표현하는 구절로 쓰인다. 즉 비단 옷을 입었는데, 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화려한 비단 옷을 입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게 환한 대낮에 입고 나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항우의 사례에서 보면, 오히려 항우에게는 비단 옷이 불행으로 작용했다. 그 비단 옷을 고향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신의 본거지를 초나라로 옮겼고, 이는 유방과의 쟁패에서 크나 큰 실책으로 남게 된다.
#6
내가 비단 옷을 얻은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이 비단 옷을 누군가에게 자랑해야만 된다는 강박적인 인정욕구(인정투쟁)는 판단의 기준을 아닌 스스로가 아닌 외부에 돌리는 일이고, 이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유발할 뿐이다.
SNS에 끝없이 본인의 화려한 장면만을 올리는 사람들이, 실제 자기 모습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공허함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할 것이다.
비단 옷은 그냥 나를 치장해 주는 장치일 뿐이다. 그걸로 굳이 사람들에게 나를 과시할만큼 나의 본질이 허약하진 않다. 이런 마음이 중요하다.
김 대표 역시 부모님의 평가와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인정은 타인의 찬사가 아니라, 스스로의 성취에서 얻어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