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게 하는 문구(5) 화광동진
#1
10년 전, 대형 로펌에서 독립하고 작은 사무실을 개업했을 때, 큰 꿈을 품었다.
그 동안은 로펌의 이름값을 바탕으로 일했다면, 이제는 내 이름으로 세상과 마주하리라. 처음부터 쉽지 않겠지만, 점진적으로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대형로펌의 이미 갖추어진 시스템을 기반으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내 눈높이는 괘 높았던 것 같다. 막상 작은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직원 고용과 장비 구매 등 다양한 문제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시설 문제, 세금과 공과금 문제, 그리고 직원들과의 장황한 협상 등이 있었다.
#2
독립한지 1년 쯤 후에는 내 인생이 정말 피폐해짐을 느꼈다. 거창한 이상과 함께 성장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매일 마주하게 되는 사소한 문제들에 고군분투하며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였는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그런 고민에 휩싸이면서 사무실의 성장은 침체되었다.
갑자기 예전 큰 로펌 시절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제공되었던 그 날들, 어디를 가서 비즈니스 카드를 내밀면 사람들이 "오, 000에서 일하시는구나!"라고 말해주던 날들. 다른 설명조차 필요하지 않았던 그 시절들.
이런 와중에 알게 된 한 구절."화광동진"
#3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노자(老子)》에 나오는 구절로, 자기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참된 자아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이 문구의 첫 느낌은 ‘난 아주 잘 난 사람인데, 그래, 다소 미흡한 너네들과 함께 어울려줄게’라는 다분히 중2병적인 허세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문구의 해석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종합해보니 좀 더 깊은 뜻이 드러났다.
#4
“군자가, 본인이 생각하는 높은 뜻을 이루기 위해, 본인의 말과 행동을 낮추어 온순하게 하여, 무리와 화합함으로써 무리를 승복시켜 결국에는 뜻을 이룬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 사상과도 닿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무위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광동진처럼,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의 뾰족함을 숨기면서 세상과 어울리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진정한 무위(無爲)다.
한방 맞은 듯 했다.
난 세상에 나와서 세상 속에서 내 뜻을 펼쳐보이리라 생각했으면서도, 아직도 대형 로펌에 살던 그 시절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몸을 물에 담그지 않았기에 ‘내가 초라해졌다’느니 ‘이런 작은 고민을 하고 있다니’ 라고 허세를 부렸던 것이다.
#5
주역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겸(謙)’괘. 겸손을 의미하는 괘인데, 그 괘의 모양䷎이 위가 땅(地)이고 아래가 산(山)이다. 이를 주역에서는 ‘지중유산’(地中有山)이라 한다. 이에 대해서 명나라 학자 정이(程頤)는 ‘산이 땅속에 있다’가 아니라 ‘땅속에 산이 있다’로 한 것에 주목했다.
‘높은 자가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있는 것’이 아니라, ‘낮게 있으면서 고귀함을 간직한다’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본래 높다거나 많이 가졌다는 의식이 없이, 늘 변함없이 낮게 있지만 그의 내면에는 단단하고 밝은 덕이 간직되어 있다는 뜻으로 보았다. 말과 행동이 부드럽고 공손한데 그 속에 단단함이 없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그저 시류에 따라 흘러 다니는 부평초에 그치고 말리라.
#6
그 날 이후 나는 생각한다.
그래 화광동진하자. 내 비록 여기서 지엽적이고 자잘한 문제들에 발에 걸려 고민하지만 내 꿈은 여전히 크고 높다. 내가 발붙이고 있는 이 현장에서 착실한 기반을 잡으면서 올라가자. 그렇게 일궈낸 성취가 진짜배기다.
화광동진. 아주 멋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