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변호사, 태평양 로펌에 가다> (3) 자네, 바쁜가?
#1
오리엔테이션때 선배변호사가 로펌생활의 꿀팁이라며 알려준 것이 있다.
“선배들이 ‘바빠?’라고 물을 때 대답 잘 해야 해. 선배들은 자네들이 바쁜지 정말 궁금해서 그걸 물어보는 게 아냐. 일을 같이 해 보자는 은근한 권유를 할 때 이런 말을 쓰곤 하지. 거기다 대놓고 순진하게 ‘네, 바쁩니다’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될까? 좋은 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겠지? 기회를 많이 부여받아야 자네들이 성장할 수 있겠지? 명심하라구.”
아. 그런 거구나. 선배님의 꿀팁을 잘 입력했다.
“어이, 조 변호사. 어때 할 만 해?”
내 방 문이 슥 열리면서 선배 김인만 변호사가 두리번 거리며 들어오셨다.
“아...네.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뭘. 긴장하고 그래. 태평양에 들어올 정도면 다 기본은 할 텐데.”
“아..예.”
#2
김인만 변호사는 회사정리 파트의 칩이다.
당시(1997-1998년)는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기업들이 부도로 쓰러지고 있을 때였다. 이런 기업들은 법정관리나 회생절차 등을 통해 다시 재생의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 부도위기에 놓인 기업들로부터 사건을 위임받아 법원에 법정관리, 회생신청을 통해 ‘채무를 동결, 유예’하고 다시금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도록 하는 절차를 주로 진행하는 파트다.
기업입장에서는 법정관리나 회생신청이 받아들여져야 파산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큰 돈이 들더라도 변호사를 선임하여 이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 로펌 대부분은 IMF 당시 이런 류의 사건을 대거 맡으면서 기반을 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사정리 파트는 소속 변호사가 많지 않고, 급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다른 부서의 주니어들을 차출해서 3박 4일 정도 호텔에 가둬놓고 일을 시키곤 했다.
#3
“그래, 조 변호사. 고향이 밀...양 이라지?”
“네, 그렇습니다.”
“그래. 딱 우리 태평양스럽네. 김앤장은 서울 출신들이 많은데, 태평양은 거의 촌놈들이지. 허허허”
아... 네. 용건을 말씀하시죠...
“밀앙이면, 얼음골 유명하지? 내가 대학교 때 얼음골에 갔었는데. 진짜 신기하더라. 여름인데도 얼음이 얼던데?”
“네...” 정작 밀양출신인데 얼음골은 가보지도 못했어융....
아주 친근하게 눈웃음을 치던 김변호사는 훅 들어왔다.
“조 변, 바뻐?”
#4
아... 이거구나. 바로 이 질문이구나.
나는 배운 대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바쁘냐고 물어봤는데 뭘 그리... 그럼 일 하나 같이 해볼까?”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이번 주에 처리해야 할 의견서가 3개인데 이거 잡혀 들어가는 거 아냐? 난 불안했다.
“그래. 그럼 우리 팀 비서가 신호줄 거야. 필요한 기자재는 우리가 다 들고 갈테니 몸만 오면 돼.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사우나도 하고. 소풍간다고 생각해.”
김변호사는 내 어깨를 만졌다.
“흠... 참 실하네.”
“네?”
“아니, 실하다고. 밤샘 며칠 해도 거뜬 하겠네? 허허허”
아... 네... 내가 소냐? 실하게?
조금 뒤 내 비서 태신씨가 들어왔다.
“어머, 변호사님. 호텔 들어가세요?”
“아.. 뭐.. 오라고 하니..”
“보통 2년차 이상들을 데리고 가시는데 신입이 들어가시는 건 처음인데요? 인정받으시나봐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게... 실해서...’
이렇게 나의 첫 호텔작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