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변호사, 태평양 로펌에 가다> (4) 자네, 바쁜가?(2편)
#1
실하다는 이유로 선배에게 차출되어 호텔작업에 투입되었다. 사무실 차를 타고 충정로의 모 호텔에 갔다. 보니 실하게 보이는 다른 팀의 주니어 변호사 5명이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차에 앉아있었다.
이런 호텔작업은 대단히 은밀하게 진행된다. 예를 들어 A기업이 법정관리를 신청한다고 치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는 소식이 시장에 알려지면 주식은 폭락할 것이 뻔하다. 따라서 기업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모든 절차는 초극비리에 진행되고, 법원에 신청서가 제출되는 직후 시장에 알려지게 된다.
김인만 변호사는 주니어들에게 주의를 줬다.
“경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처음 들어가는 사람도 있을테니 당부를 하자면. 이건 극도의 보안을 유지해야 해. 휴대폰 전부 반납하고. 호텔 내에서 외부로 연락금지야. 사흘만 잘 참아. 호텔 내에서 보게 되는 일들은 호텔 나올 때까지 절대 외부로 발설하면 안돼. 이건 철칙이야!”
아까 그 사람 좋던 느낌과는 싸늘하게 돌변한 표정. ‘저승사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이니 어련할까.
#2
호텔에 가서 짐을 풀고 스위트룸에 전부 모였다. 사건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우리가 법정관리 신청을 해야 될 기업은 K물산, H전자 두 곳이었다.
헉... 여기 엄청 잘 나가는 데잖아? 근데 부도 위기라고? 의외였다.
스위트룸에는 자료가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그리고 각 회사에서 파견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초췌한 표정들이었다.
법정관리신청을 하는 일을 심플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1) 법원에 제출할 법정관리신청서를 작성하면 된다.
2) 그 신청서의 주요 내용은 ① 1부 : 이 회사가 어떻게 성장해왔다. ② 2부 : 하지만 이 회사가 지금 이렇게 어려워졌다. ③ 3부 : 하지만 앞으로 이런 저런 기회요소가 있고 개선의 여지가 있으니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니 살려주십쇼. 로 구성된다.
3) 특히 3부가 중요하다. 이 부분을 설득력 있게 작성하기 위해서 많은 자료를 잘 첨부해서 제출해야 한다.
#3
나는 다른 주니어 변호사 2명과 함께 K물산의 법정관리 신청서 초안 작업을 담당했다. 수많은 자료들을 읽다보니 한 기업의 흥망성쇠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잘 나가는 기업도 현금흐름 관리를 안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잘못된 투자 몇 건이 회사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밥은 전부 룸서비스를 통해 시켜서 먹었고, 잠시 사우나가는 것만 허용되었다. 자는 둥 마는 둥 거의 하루에 20시간씩 법정관리 신청서 작성에 몰두했다. 우리 팀은 어느 정도 서류 작성을 마치고 그 초안을 들고 김인만 변호사에게 검토를 맡으러 스위트룸으로 갔다.
김변호사는 매의 눈으로 우리가 작성한 신청서 초안을 훑어 보았다.
#4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네. 자네들이 쓴 이 신청서는 말야. 이 기업이 왜 망가질 수밖에 없는지는 정말 설득력있게 썼는데, 이 기업이 왜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왜 이리 부실한가? 이게 서로 바뀌어야 하잖아? 회생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자료를 보강하고 철저하게 써.”
헉. 빠꾸를 맞았다. 우리팀은 김변호사가 지적해 준 부분 보강을 위해 빡세게 회의를 했다. 사실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잘 해 낼 것이라는 부분은 미지의 영역이다. 약간의 구라(!)도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머리를 짜내며 신청서 보완작업을 진행했다.
#5
“그래, 이 정도면 됐다. 고생했어,”
김 변호사는 우리의 수정본에 흡족해했다. 우리는 맥이 탁 풀렸다.
이제 철수.
호텔작업은 정말 진을 빼게 하는 작업이었다. 반납한 휴대폰을 다시 돌려받는데, 김 변호사가 봉투를 한 개씩 나눠줬다.
“고생했어...”
뭐지? 금일봉? 아싸!!!! 피곤이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날 오후 바로 K물산에 대한 법정관리 신청이 기사화되었다. 주주들과 채권자들이 난리가 났단다. 그로부터 4일 후에 법원에 의해 법정관리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휴... 다행이다. 법정관리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은 내게 큰 보람을 안겨다 주었다.
#6
“조 변호사... 잘 지내?”
몇 주 뒤 다시 김인만 변호사가 내 방에 스윽 들어왔다.
“아...네...”
“조 변호사.. 군생활을 백마부대에서 법무관으로 지냈다면서?”
“아..네.. 그랬습니다.”
“백마부대 좋지. 난 그 옆에 1사단에서 법무관 했었지. 가까운 데 있었네.”
아...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김 변호사는 살짝 눈웃음을 치며 은근히 물었다.
“조 변호사. 바뻐?”
= 5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