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변호사 태평양에 가다> (5) 한줄기 눈물
#1
내 비서가 따로 있다는 점은 감동 그 자체였다. 내게 비서라니.
당시 변호사 2명에게 1명의 비서가 배속되는 형태였다. 방도 정리해주고 커피도 타주고 일정관리도 해주고. 우와...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거?
내 신입시절 비서 화정씨는 베테랑이었다. 거의 10년차 비서였다. 당시 화정씨는 나와 함께 5년차 선배의 비서를 같이 담당했다.
#2
나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이런 장면을 꿈꿨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화정씨에게 눈인사를 보낸다. 화정씨는 특유의 그 시크한 미소로 답한다. 향긋한 원두커피를 들고 들어와서는 내게 건네는 화정씨. 오늘 하루 스케쥴을 다시 확인해 준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커피를 음미하면서 스케쥴을 재확인한다. 카페인이 주입되면서 새로운 에너지가 온 몸을 감싼다.
“화정씨, 오늘 저녁 약속 있어요? 없으면 내가 잘 아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점심 같이 할까? 팀이 된 지도 제법 되었는데 그동안 서로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잖아.”
“어머, 호호호 좋아요.”
일과를 마치고 청담동에 있는 G 레스토랑으로 갔다.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의뢰인으로부터 받은 클래식 공연 티켓을 화정씨에게 선물로 줬다.
#3
하지만 실상은...
어제 새벽까지 일하다보니 아침에 늦었다. 사무실 도착이 9시 40분.
화정씨가 눈을 째리고 있었다.
“이형석 변호사님이 찾으셨어요. 일단 잠시 자리 비웠다고 둘러댔는데, 얼른 가보세요.”
‘아, 뭐지? 어제 현대건설 사건 준비서면 검토 때문인가?’
나는 얼른 넥타이를 매고 선배 방으로 달려가려 했다.
화정씨가 나를 가로 막았다. “변호사님, 거울 좀 보세요. 완전 새집...”
헉.. 물 묻혀서 대강 새집을 가다듬고 이변호사 방으로 갔다.
#4
내가 어제 검토를 올린 준비서면은 완전 총 천연색으로 난도질당한 상황이었다.
“요즘 사법연수원에서는 뭘 가르치지? 이건... 너무 기본이 안된 거 아냐? 선배에게 이런 식으로 던져주면 어떻게 고치란 말인가? 응?”
선배의 손에 쥐어진 내 준비서면은 펄펄 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야, 이 서면 뒤에 붙어있는 증거자료들. 넘버링도 제대로 못해? 갑제5호증 다음이 왜 갑제7호증이야? 6호증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이번 주 금요일이 재판인데, 이 정도 완성도를 가진 서면을 내게 초안이라고 주면 재판을 말아먹자는 말 아냐? 당장 다시 써!!!”
#5
눈물이 핑 돌았다. 내 방에 돌아와서는 내 준비서면 초안의 빨간펜 선생님 버전을 차근 차근 읽어보았다.
더 열받았다. 선배의 지적 하나하나가 다 맞았다. 아... 이거 내가 과연 변호사 할 수 있는 거 맞나?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저...화정씨. 내가 증거자료 넘버링도 잘못했고, 또 다시 바꿔야 해서. 자료를 다시 만들어야 할 거 같아요.”
비서들끼리는 그런 이야기를 한단다. 신입 변호사 비서 하는 건 정말 성가시다고. 선배들에게 지적 당하면 계속 자료를 다시 만들어서 보고해야 하는데 그 일을 비서가 해야 하니.
특히 이 번 사건은 자료가 많아서 화정씨가 일일이 다 복사하고 스캔하고 해서 자료 만들었는데, 넘버링이 뒤바뀌면서 다시 작업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주 살짝 화정씨의 짜증스러워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
#6
하루 종일 그 서면작업을 보완하고 자료정리 다시 해서 이 변호사께 검토를 올렸다. 그리고는 허탈하게 책상에 앉아 있는데, 화정씨가 믹스 커피 한 잔 타서 들어왔다.
“변호사님... 힘 내세요. 다들 신입 때는 그래요. 그래도 변호사님은 잘 하고 계세요.”
흑... 눈물이 쭈르르 흘렀다. 아 이 무슨 망신인가.
누나나 이모를 보듯 화정씨를 올려다보았다.
- 6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