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 (11) 사무실이 여관이 되다
#1
변호사라는 명찰을 달긴 했지만 초반 6개월 동안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선배들이 던져 주는 일거리를 처리하는 데 시간만 많이 잡아먹고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가뭄에 콩 나듯, 어떤 일은 칭찬을 듣긴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계속 수정에 수정을 거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특히 특정한 선배가 주는 일은 더 그랬다.
#2
궁합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내 직속 선배 중 이형석 변호사와의 궁합은 최악이었다. 이상하게 그 선배와의 일에서는 실수도 많이 하고, 내가 생각해도 퍼포먼스가 영 꽝이었다.
그건 이 변호사가 워낙 꼼꼼하고 일에는 엄격한 성향이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다른 선배들은 내가 초안을 올리면 그 초안 자체를 문서 파일로 달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 파일을 공유 폴더(그 당시 P 드라이브)에 올린다. 선배는 그 파일 자체를 직접 수정하면서 파이널 작업을 한다. 나는 파이널 된 문서를 보고서, ‘아, 이렇게 수정했구나’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 변호사는 꼭 빨간펜 선생 방식을 택했다. 일일이 펜으로 줄을 긋고, 삽입선을 넣어서 추가기재하고, 당구장 표시해서 어떤 점을 보완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그리고 내가 미처 찾아보지 못한 논문 중 해당 부분을 카피해서 뒤에 첨부한 다음 그것까지 반영해서 다시 작성해 오라고 시켰다.
특히 증거서류 같은 것들은 그대로 나가도 될 것 같은데 순서도 계속 바꿨다. 순서를 맞추는 것도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 이 변호사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증거서류를 바꾸면 내 비서는 다시 노가다를 해야 한다. 나는 그것도 스트레스였다.
#3
이 변호사가 시키는 일에서 계속 문제가 생기자 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투입하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자책을 했다. 그래서 한가지 결심을 했다. ‘집에 가지 말자!’
당시 나는 주말부부였기에 어차피 주중에는 집에 나 밖에 없었다. 보통 11시 정도까지 일을 하는데, 그 이후 시간도 일에 투자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터 퇴근을 안 했다. 보통 새벽 2~3시까지 일을 하고는 의자 2개 붙여서 간이 침대를 만들어 거기서 잠을 청했다(그때는 미처 라꾸라꾸 침대 생각을 못했다). 6시 반 정도되면 청소하시는 분들이 사무실을 순회하신다. 그때 잠이 깨면 화장실 가서 세수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서 일을 시작한다.
사실 사무실에서 잠을 잔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퇴근하고 난 빈 사무실에서 내가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그 공간에 홀로 있다보면 내가 주인공이 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빨리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의자에서 자다보니 허리가 아팠다. 하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뿌듯함이 있었다. 새로운 공간에 빨리 익숙해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4
아, 솔직히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
내가 미쳤었나 보다. 억눌린 무언가가 터져나온 느낌. 나는 이형석 변호사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냅다 이 변호사에게 소리쳤다.
“이 변호사님. 솔직히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 변호사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냐, 조변호사?”
“솔직히 그렇게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줄 수 있는 겁니까? 선배면 선배지”
난 씩씩거렸다. 이 변호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너 미쳤냐? 선배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다른 선배들은 이 정도는 아닌데. 그냥 적절히 넘어갈 수도 있는데, 하나하나 꼬치꼬치 다 문제 삼고. 선배님은 처음부터 잘 했었습니까!”
이러다가 로펌에서 잘리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스트레스 받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뭐, 나가라면 나가야지. 그러자 이 변호사가 일어서며 내 멱살을 잡았다.
난 그 멱살을 확 뿌리치며 “놓으십시오!”라고 외쳤다.
#5
‘아이고, 변호사님. 떨어지겠습니다. 여기 청소 좀 하입시다.’
우잉? 나는 퀭한 눈으로 두리번 거렸다. 난 수면 의자에서 삐딱하게 누워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나를 받치고 있었다.
뭐냐. 꿈이었나.... 식은 땀이 흘렀다. 휴... 안도감. 그러면 그렇지.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했겠냐. 선배에게 그렇게 달려들다니. 어지간히 스트레스 쌓였었나 보다.
그렇게 1997년 여름 신아빌딩 214호 내 방은 여관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