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빌런이 내 강의 내공을 올려주다

by 조우성 변호사

<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 (10) 빌런이 내 강의 내공을 올려주다


#1

1992~1993년 당시 신림동에서 강의를 할 때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총 10회 강의라고 하면, 1회는 공개강의다. 즉 돈을 안내고 와서 강의를 일단 들어보고 2회 때부터 돈을 내고 정식 수강신청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사들은 1회 때 특히 공을 들여서 강의를 한다. 일종의 show case인 셈.

만약 1회 공개강의 때 40-50명이 들으러 왔는데 2회때 10-20명 정도가 수강신청을 하면 난감해 진다. 학원 입장에서는 ‘이 강사가 별로 실력이 없나봐’라는 인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고시생들은 일단 무료 강의니까 머리도 식힐 겸 와서 듣는 경우도 많았다. 여하튼 강사로서는 1회 수강생 숫자보다 2회 수강생 숫자가 줄어들면 스트레스다.


#2

난 아직도 이와 관련된 악몽을 꾼다.

갑자기 내가 고시학원 강사시절로 돌아갔다. 1회 강의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거의 100명 가까이 강의를 들었다. 오늘은 2회차 강의날. 정식으로 돈을 내고 듣는 사람의 숫자가 정해지는 날이다. 나는 강의 시작 시간보다 1시간 일찍 와서 수시로 강의실을 몰래 들여다 보고, 수강생이 몇 명인지 세어 본다. 헉... 10명도 안되다니... 20분 전, 10분 전, 5분 전. 강의 시작 시간은 다가 오는데 수강생은 늘지 않는다. 저기서 학원 관계자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날 더러 손짓한다. 이 정도면 폐강이 되지 않을까...아... 이렇게 버둥거리다가 깬다. 중요한 선고를 앞두고 있거나 할 때 이 악몽을 자주 꾼다. 당시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으니까.


#3

앞서 말한 대로 1회 공개강의가 중요하다. 이 때 삽질을 하면 안 된다. 그런데 공개강의에는 빌런이 등장한다. 보통 고시공부를 오래한 장수생들인데, 그들이 보기에는 솜털 뽀송뽀송한 어린 애들이 합격했다고 강의를 한다는 것이 꼴사납게 보이기도 했으리라. 꼭 1회 공개강의 때 어려운 질문을 툭 던진다. 그리고는 강사가 약간 헤매면 ‘에이, 뭐 더 들을 것도 없네~’라면서 분위기를 어지럽힌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강사들로부터 들었고, 나도 한 두 번 그런 경험을 했다. 대책이 필요했다. 고심을 하다 나 만의 대책을 마련했다.


#4

1회 공개강의를 할 때 사전에 수강생들에게 부탁을 한다.

“혹시 중간에 질문할 내용이 있으셔도 수업 중에 바로 하지 마시고 쉬는 시간에 따로 해주십시오. 진도 때문에...”

하지만 빌런들은 그 말을 따르지 않는다. 한창 열심히 수업 진행하고 있는데 장비처럼 생긴 고시생이 손을 번쩍 든다. 내가 애써 무시하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자 ‘저요~ 강사님~’이라며 소리를 친다. 어쩔 수 없다. “네, 무슨 일이시죠?”

그럼 빌런은 아주 까다롭고 애매한 문제를 물어 본다. “강사님. 이 문제에 대해서 김철수 교수님과 권영성 교수님의 입장은 이해하겠는데, 최근 허영 교수님 논문을 보면 다른 식의 입장을 보이십니다. 아시죠? 허영 교수님 입장은 그럼 두 분 교수님 중 어느 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까?” 뭐 이런 식이다. 잉, 시험에도 안 나올 문제인데.


#5

이 때 대응이 중요하다. 절대 당황하면 안된다. 나는 ‘아~, 그 문제요?’라면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줘야 한다. 그러면서 머리는 바쁘게 돌아간다. 어딜 봐야 그 답을 얻을 수 있지? 그리고는 그 문제를 설명할 것처럼 칠판으로 돌아섰다가 다시 수강생쪽으로 돌아선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시계를 본다. “아, 제가 지금 설명드릴 수도 있는데, 이건 워낙 마이크로한 문제라... 전체 진도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좀 있다 쉬는 시간에 강사실로 오시면 설명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


#6

중간에 쉬는 시간이 되면 후다닥 강사실로 내려 간 다음 문을 잠그고 열심히 관련 자료를 뒤진다. 역시 어려운 문제군... 하지만 대략 어떻게 답을 할지 정해둔다.

노크소리. 빌런을 맞이 한다. 그 다음도 중요하다. 우선 차를 한 잔 대접한다. 그리고 아이스브레이킹.

“공부하시느라 힘드시죠? 전 어쩌다가 소 뒷걸음질에 쥐 잡은 격으로 얼렁뚱땅 합격해서... 쑥스럽습니다.”

이렇게 겸양의 말을 늘어 놓은 다음, 아까 그 질문에 대해서 나름의 답변을 한다. 하지만 그 답변이 100% 완벽하지는 않다. 그 다음이 또 중요하다. 자료 한 뭉치를 건넨다.

“저어기... 이거 제가 따로 정리해 놓은 건데요. 공부하시는 데 도움되시면 좋겠습니다. 나름 엑기스 들입니다. 네네.”

이 정도로 진행이 되면 빌런과 나 사이에는 묘한 케미스트리가 형성된다. 빌런은 ‘자식, 괜찮은데’라는 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간다.

이 과정을 거치면 그 빌런은 강의실에 다시 들어와서 적어도 나에 대한 나쁜 말은 하지 않는다.

생존법칙을 배우며 마이크 밥을 먹었다. 나름 살벌한 고시생들과 부딪히면서. 내 강의 내공은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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