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 (13) 여전하구나. 친구여
#1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마치고 내려오다 정말 오랜만에 대학 친구를 만났다.
“아, 오랜만이네. 필규야.
“어, 우성아. 진짜 오랜만이네.”
하... 이 친구. 지금 뭐하고 있지? 변호사가 되었었나? 갑자기 예전의 기억이 훅 떠올랐다.
#2
내가 한창 고시공부할 때인 1989~90년. 대학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시위가 계속되었다. 법과대학에서는 일찌감치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고시파들이 있었고, 반대로 학생운동에 매진하는 운동권이 있었다.
법대 도서관에서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나로서는, 바깥에서 시위 소리가 들릴 때면 마음이 뒤숭숭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피 끓는 젊은이로서, 불의에 항거하지 않고 일신영달을 위해 고시공부를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데 대한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나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집에서 자주 전화가 온다. “제발 시위에 참가하지 말거레이. 혹시라도 호적에 빨간 줄 남으면 안 된다. 신세 조진다.”
#3
필규는 87학번 D반 반장이었다. 그리고 운동권이었다. 수업거부를 독려하고, 교내 시위에도 자주 참가했다. 진작부터 고시공부와는 담을 쌓았었다. 하지만 비운동권 친구들에게 운동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리고 항상 솔선수범하는 반장이었다.
사람 좋은 웃는 낯을 가진 넉넉한 친구였다.
언젠가 내가 법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잠깐 나와 쉬고 있는데, 시위를 마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오는 필규를 마주쳤다. 난감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응, 필규야. 고생이 많지?”
난 입신양명을 위해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응, 괜찮어. 공부하기 힘들지 않어?”
절대 빈정거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넌 이렇게 고생하는데, 난 공부나 하고 있고...”
“무슨 소리야. 각자 자기 할 일이 있는 거지. 학생이 공부하는 게 당연한 거지. 난 내 일 하는 거고. 넌 니 일 하는 거고. 열심히 해!”
진정으로 내게 해 주는 격려였다. 난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
아마 필규는 그때를 기억하진 못하리라. 하지만 난 분명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필규는 뭘 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걸까? 궁금했다.
서로 명함을 주고 받았다. ‘공익인권법인 공감, 변호사 황 필 규’. 오호.
“여긴 뭐 하는 곳이야?”
“응, 소수자를 위한 공익단체인데, 관련해서 소송들을 도와주고 있어.”
아하... 그렇구나. 정말 필규다운 모습이었다. 가끔씩 연락하자며 인사하고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 사법시험은 나보다 11년 늦게 합격했다. 그 11년의 세월이 어땠을지 가늠이 잘 안 된다. 필규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바로 공익인권법인에 들어간 것이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을 많이 하고 있었다.
친구, 자넨 정말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정말 멋지다. 자네가 내 친구라서 자랑스럽네.
필규의 순수하고 일관된 열정을 떠올리며, 나도 그 열정을 마음속에 담아 내 일에 더욱 헌신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