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19) IP팀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
#1
나는 빨리 IP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통 변호사들은 IP를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IP에서 주로 다루는 특허법, 상표법, 저작권법, 부정경쟁방지법 등은 사법시험의 필수과목이 아니다. 그리고 사법연수원에서도 잠깐 맛을 보는 정도로 배우는 수준이다. 그리고 IP쪽은 기술적인 문제가 많기 때문에 문과 출신이 대부분인 변호사들은 상대적으로 어려워하는 분야다. 법리도 생소하고 다루는 영역도 생소하고.
그리고 또 무엇보다 큰돈이 안 되는 영역이었다(적어도 1998년 그 당시는. 지금은 완전 다르지만).
오히려 돈은 건설이나 법정관리 등의 사건이 크게 되었다. 다만 아주 막연하게 ‘미래에는 유망할 것이다’라는 애매한 전망만이 존재하는 그런 영역이었다.
#2
나는 일단 특허법, 상표법, 저작권법 교과서를 구입한 다음 최대한 빨리 읽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어려웠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황보영 변호사(앞으로 태평양에서 주로 부르던 이니셜, byh로 칭하기로 한다)는 “교과서로 공부해봐야 머리에 잘 안 들어 온데이. 사건 통해서 배우는게 제일 빨라. 앞으로 내가 주는 사건 하나 하나를 열심히 파보라구,”라고 조언했다.
#3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나는 byh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내가 모셔야 할 사수니까, 이 분만 제대로 파악하고 거기에 맞출 수 있으면 게임은 끝난 거니까. 한 달 정도 호흡을 맞추다보니 대략 감이 왔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우선 성격이 대단히 급하다. 본인의 일처리가 워낙 빠르니 그런 것도 있으리라. 그 업무스피드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2) 동시에 성격이 불같다. 변호사들은 기본적으로 조용 조용히 말하고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는 스타일인데, 이 분은 거침 없는 분이다. 회사 조직 운영과 관련하여 대표변호사님(김인섭 변호사님)과 대판 싸운 일은 전설로 남아 있다. 대표변호사님은“내가...참,,, 우리 마누라보다 황보영이가 더 무섭다”라는 말을 남기셨을 정도니까.
3) 영어를 엄청 잘 한다. 누구 말로는 우리나라 변호사 통틀어 제일 스피킹이 뛰어나다고 한다. 원래 로펌 변호사들이 잠깐 미국 유학다녀오면 쓰고 읽는 건 조금씩 숙달되는 편인데, byh는 스피킹 자체가 완벽하단다. (byh는 하버드 유학파)
4) 엄청난 악필이다. 본인이 메모해 놓고서 못 알아보는 일이 많다. 급한 성격 때문이려나? 1년쯤 지나니 byh의 필체를 가장 잘 알아보는 사람은 바로 내가 되었다. byh는 내게 자신의 메모를 보여주며 “이거, 내가 뭐라꼬 써 놓은 기고?“라고 물어보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아주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점잖게 그 메모의 내용을 읽어주곤 했다.
5)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다. 보통 변호사들 선후배간에 인간적으로 친해지면 실수가 있더라도 스무스하게 넘어간다. 하지만 byh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제 밤에 같이 와인을 마시며 인생을 이야기했다 하더라도 다음 날 아침 일을 허투루하면 곡소리 나게 야단 맞는다. 아주 혼쭐을 낸다. 그래서 아마 후배들이 잘 못 버틴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6) 당연히 승부근성이 대단히 강하다.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그 한 뼘을 더 나가기 위해 온갖 자료를 뒤지고 발을 동동 구르는 스타일이다. 적당한 타협이 없다. 이게 또 후배들이 힘들어 하는 부분이었다.
7) 당연히 워커홀릭. 사무실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대표 주자다. 근데 독특한 것은 새벽에 댁에 가서는 비디오를 즐겨 본단다. 그런데 그 비디오가 중국 무협물. 김용 원작의 의천도룡기 같은 거, 30편짜리. 내가 한번 물어봤었다. “왜 그런 걸 보세요?” byh의 답은 명료했다. “재밌잖아?~~” 아, 진짜 독특하다.
8) 의뢰인 제일주의를 강조했다. 일단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의뢰인이 하는 말은 다 들어라. 그 속에 답이 있다. 변호사가 아무리 똑똑해도 의뢰인만큼 그 사건을 잘 알지는 못한다. 사건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경청하라. 성질 급한 byh와는 다소 상충되는 듯 한데 이런 업무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4
신기한 건 나는 byh가 좋았다. 업무적으로 힘든 부분은 있었지만 byh가 지시하는 게 다 옳아보였고, 그렇게 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기에 별로 반감이 들지 않았다.
사건 하나를 마치면 byh는 꼭 날 잡아놓고 물어본다.
“니, 이번 사건에서 배운 교훈이 뭐꼬?”
그래놓고 본인이 포인트 몇 개를 딱 집어 준다. 그러면서 혼자 꺄르르 웃는다.
“이런 선배가 또 어데 있노? 이래 챙겨주고 말이제. 호호호”
흐흐흐. 나도 너털웃음을 짓는다.
직장 동료들은 나와 byh의 케미스트리에 대해 상당히 흥미롭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