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26) 국제특허분쟁(2)
#5
이 사건에는 태평양에서 여러 인원이 투입되었다, 변호사 5명, 변리사 4명. 변호사들 중에서 가장 대빵은 이후동 변호사(hdl)이 맡았다. hdl은 byh보다 2년 선배인데, 일본 통이었다. 우리나라 변호사 중에서 일본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 일본 유학파.
‘hdl은 꿈도 일본어로 꿀 정도다’는 말이 있었다. 태평양 내 중요 일본 기업 사건에서 활약을 하는 선배다.
나는 실무를 총괄하는 역할이었다. 소송을 준비하고, 실제 법정에 나가서 변론을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hdl이 내게 주의를 줬다.
“조변, 일본 기업이랑 일을 할 때는 재판보다 더 중요한 게 그쪽과의 회의 준비야. 그 사람들은 회의를 엄청 꼼꼼하게 해. 아마 재판 준비보다 회의 준비가 더 빡셀거니까 그리 알고 있어.”
#6
보통 회의는 텔레컨퍼런스(전화 스피커폰)로 진행되었다(당시만 화더라도 화상회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회의실에 우리쪽 인원이 다 앉아서 스피커폰을 켜면 상대방에서도 여러 사람이 참석해서 대화를 나누는 식이다. hdl이 회의 진행과 통역을 동시에 맡아서 진행했다.
그 회의 한번이 보통 2-3시간이다. 우선, ① 그 당시까지 미국, 네덜란드,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 진행하는 소송 상황을 니콘 측에서 설명한다. ② 그 다음에는 우리의 다음 법정 진행 상황을 보고 한다. ③ 우리의 보고에 대해서 니콘은 그대로 갈 것인지 다른 수정사항이 있을지 의견을 준다. ④ 논의된 의견들을 종합해서 액션플랜을 정하고 회의를 마친다.
회의할 때 참 흥미로운 점은 일본 기업은 숫자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이번 첫 재판 때는 상대방이 실질적인 답변이 아닌 형식적인 간단한 답변서를 내면서 다음 기일로 속행하는 전략을 펼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상대방이 그런 전략을 펼칠 가능성을 숫자로 표시하면 어떻게 될가요? 윗선에 보고해야 합니다.”
“법원은 이번 기일에 우리측 감정신청을 받아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법원이 우리측 감정신청을 받아 줄 가능성을 숫자로 표시하면 어떻게 될까요? 윗선에 보고해야 합니다.”
이런... 비 올 확률을 예측하는 식으로, 나는 매번 회의 때마다 우리가 보고하는 내용 중에서 의뢰인이 ‘숫자로 표현해 달라’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을 미리 집어내서 숫자를 기록했다. 역시 정확한 걸 좋아하는 성향인가 싶었다.
#7
재판이 진행되고 우리쪽은 여러 사람이 많은 시간을 쓰면서 time charge를 착착 올려가고 있었다. 뿌듯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 점이 감지되었다. 일본과 회의를 진행하면서 파악해 보니, 다른 나라의 소송은 진짜 진행이 느렸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2년 전에 소송이 시작되었는데, 실질적인 진행이 거의 없었다. 대체 뭐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 다른 나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정이 달랐다. 재판이 계속될 때마다 실질적인 진행이 팍팍 이루어졌다. 법원은 원, 피고 쌍방에게 조속한 입증을 촉구하면서 드라이브를 걸었다. 어찌나 시원시원 진행을 하는지...
우리나라에서 소송이 시작된 지 딱 6개월만에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재판 진행이 가장 빨랐다. 뭐지? 이건 완전 예상 밖이었다.
그 전에는 회의할 때 다른 나라 상황을 점검하고, 그 나라에서 진행하는 대로 따라가는 방식이었다면, 언제부턴가는 우리가 제일 앞서 진행하므로 우리의 진행방향이 다른 나라 진행의 기준이 되었다.
큰일 났다. 우리가 이기면 다른 나라에서도 다 이기고, 우리가 지면 다 지는 그런 상황이다. 부담 없이 쉽게 돈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완전 판이 달라졌다. 부담 백배인 상황으로 바뀐 것. 난 완전 멘붕이 되었다.
#8
“변호사님, 아니 어떻게 우리나라가 제일 앞서 가게 된 거죠?”
나는 억울한 심정을 byh에게 토로했다.
“그건...우리나라 재판제도가 사실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편이야. 물론 소송을 해 본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다른 나라랑 비교했을 때는 우리나라가 가장 재판진행이 빨라. 그래서 이런 국제특허 분쟁의 경우는 우리나라 법원이 시험 법정(test ciurt)이 되기도 해.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거지. 우리나라 법원 판사들이 빨리,그리고 정확하게 재판을 잘하는 편이야.”
아... 망했다. 늦게 출발했는데, 이제 지면 내가 다 독박을 써야 한다.
“조변호사, 이 사건은 그 결과에 따라 몇 조원의 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이 좌지우지되는 건이야. 우리 잘 해야 해.”
난 억누르는 부담감에 동공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