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 (29) 작은 거인
#1
“야, 조변. 오늘 바쁘나?”
byh가 갑자기 내 방문을 확 열고 들어왔다. 맨날 일 많이 던져줘서 바쁘지 그럼 안 바쁘겠소이까? 하지만 난 생그르르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뭘 하면 될까요?”
“오랜만에 술이니 한잔 하자.”
잉? 뭔 술을? 무슨 일이 있나? 술 잘 안 드시는 양반인데...
사무실 근처 프레지던트 호텔 스카이라운지 바에 갔다. 분위기 정말 좋았다. 아... 이런 멋진 곳에 byh랑 오다니. 이건 진짜 안 될 말이었다.
나는 다소곳이 앉아 와인을 따랐다. byh는 맥주 마시듯 와인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아... 취하면 곤란한데...
#2
원래도 좀 그렇지만 오늘은 더 정신없어 보이는 byh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솔직히 겁난다.”
이 양반 입에서 겁난다 라는 말이 나오니 무척 생소했다.
“뭐...가요?”
“ETRI건 말이다.”
아... 당시(2000년) 우리 사무실에서 가장 큰 사건을 byh가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 퀄컴사와 한국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간의 CDMA 장비 판매에 대한 로열티 분쟁 사건. byh가 ETRI를 대리하고 있다. 이 사건은 법원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ICA(국제중재재판소)에서 진행 중이었다. ETRI가 퀄컴을 상대로 미지급 로열티 8,000만 달러, 향후 분기마다 400만 달러의 기술료를 계속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하는 엄청난 금액의 국제 분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 상황이었기에 이 정도 돈을 받아낼 수 있다면 국익에도 엄청난 도움이 될 그런 사건이다.
#3
국제중재건은 모든 문서가 영어로 되어 있고, 실제 ICA 법정에서 영어로 변론을 해야 한다. 영어가 완벽해야 하고 통신기술, 라이센싱 법리에 정통한 변호사가 이 일을 해야 하는데, byh가 적역이었다. 나는 이 사건에 참가하진 못했다. 내 영어 실력으로는 감히 낄 수 없는 수준의 사건이었다. byh 방에는 엄청난 두께의 영어 서류들이 책상과 바닥에 쌓여 있었는데, 그게 다 그 사건 기록들이었다. 나는 최대한 byh와 하는 다른 사건에서 byh가 신경을 덜 쓸 수 있도록 바짝 신경을 썼다.
“최종 준비서면 어제 다 써서 제출했다. 이제 중재판정만 기다리면 되는데... 이거 잘 될까?”
이 양반도 겁을 내는구나. 역시 인간이었어.
#4
“난 꼭 이기고 싶어. 로열티를 두 눈 뜨고 뺏기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건 횡포야. 계약 위반이라구. 상대방이 교묘한 주장을 펼치고는 있지만, 이기겠지? 내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것에 보람을 느끼게 된 사건이긴 한데. 결과가 좋아야 하는데...”
멍한 눈으로 날 쳐다보던 byh는 갑자기 물었다.
“조변, 내가 10년 뒤에 뭐하고 싶은지 아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난 영화사 사장 하고 싶어.”
“네?”
“영화 산업이 재미있어. 깐느 영화제 가서 아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를 픽업한 다음 적당한 가격으로 수입해서 우리나라에서 개봉하고 대박을 치면, 그건 진짜 멋진 사업이지. 1년에 한 건만 하면 돼. 변호사처럼 계속 일 안해도 되고 말야. 깐느에서 와인 마시며 영화보고 돈도 벌고. 멋있지?”
내가 알기로 맨날 새벽에 집에 가서는 김용의 무협지 비디오를 즐겨 보시는 양반인데, 무슨 깐느? 난 좀 웃기면서도 나름 멋진 꿈이라 생각했다.
#5
그로부터 1달 뒤, 사무실은 난리가 났다. ETRI가 ICA 국제중재에서 100% 승소한 것이다. 기자들의 전화가 byh에게 빗발쳤다. 대표변호사님은 직접 byh 방에 내려오셔서 “아이구, 우리 보물”이라며 기뻐하셨다. 와... 100% 이겼다고? 진짜 괴물이다.
나도 막연히만 알고 있는 사건이었는데, 막상 신문기사 내용을 보니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퀄컴으로부터 받게 될 막대한 로열티는 한국 통신산업의 기초를 다지는 R&D 자금으로 쓰여진다고 한다. 와...진짜 멋있다.
기자랑 인터뷰하고 있는 byh의 모습. 캬... 작은 거인이 따로 없다. 누나.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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