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44) 고마움을 잊지 않은 후배
#1
태평양에 입사 후 병아리 변호사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무렵, 대학 후배 신영호(가명)로부 연락이 왔다. 긴히 할 말이 있어 꼭 만나달라고 했다. ‘긴히’라는 말에 부담이 되었다. 뭘까?
대학 후배인 영호. 학창시절에 같이 사법시험 스터디를 잠깐 했었다. 1년 후배였지만 실력이 출중한 친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험 운이 없었다. 내가 사법시험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마친 후 군대까지 다녀오기까지도 계속 사법시험을 준비 중에 있었으니 1998년 당시만 해도 이미 수험생활이 7년 정도 되던 시점이다.
내가 변호사가 된 이후 그 친구의 근황을 알고는 내가 신림동에서 학원 강사를 하면서 인연을 맺은 고시서적 전문 출판사인 ‘정명사(正明社)’에 일자리를 알아 봐 주었다. 거기서 각종 교재들의 교정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그런 후배가 갑자기 날 찾아오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2
못 보던 사이 많이 초췌해진 영호. 호프집에 가서 맥주를 하면서 근황 토크를 마친 후 영호가 본론을 꺼냈다.
“선배님, 제가 진짜 이런 부탁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진짜 이 부탁을 드릴만한 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님밖에 없습니다.”
나는 순간 ‘돈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시험 공부한 지 오래되는데, 집에서는 이제 더 이상 지원을 못해주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병원비가 많이 들어가는 상황이라... 그 동안 형님이 생활비를 보태주셨는데. 이젠 취직을 하라고 합니다.”
“그랬구나... 그래서?”
“제가 알아봤는데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형님이 정명사에 저를 취직시켜주셨잖아요. 그 재직증명서를 제출하면 2000만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응... 그런데?”
“네... 그런데 대출을 받으려면 직장 재직증명서 외에 연대... 보증인이 한 명 필요하다고 해서.”
#3
아... 역시 예상대로. 근데 돈을 직접 빌려 달라는 것은 아니고 연대보증을 서 달라는 부탁이다. 2,000만 원이라.
“형님, 저 딱 2년만 더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과감히 포기할랍니다. 제가 군 면제라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벌써 시간을 많이 까먹었습니다.”
“그래...”
“형님, 염치 불구하고 부탁 드립니다. 이거 못하면 전 평생 한이 될 것 같습니다.”
2,000만원 연대 보증이라. 많다면 많은 돈이지만 솔직히 로펌 변호사 입장에서 2,000만 원 때문에 인생에 문제 생길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고시생활의 경험이 있던 나로서도 이 친구가 얼마나 절박할 지 공감이 되었다.
“그래. 하자. 내가 언제 어디로 가면 되노? 구비서류 미리 알려주라.”
며칠 후 나는 국민은행 신림2동 지점에 가서 후배의 대출에 대해 연대보증을 섰다. 싸인을 하고 나오면서 후배에게 말했다. “열심히 해 보거라. 원도 한도 없이.”
나는 어차피 이 돈을 후배가 못 갚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이번달부터 얼마씩 모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4
영호는 그 후 2번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 2번째 시험에서 낙방한 후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선배님, 저 취직할게요. 대출금은 제가 다 갚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후 영호는 부동산 금융회사 법무팀으로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알 좋은 회사였다. 서울대 법대 졸업생이니 그 정도는 합격할 거 같았다. 은행에서 별다른 연락이 내게 온 것이 없는 걸 봐서는 영호 말대로 돈을 다 갚았던 가 보다 싶었다.
#5
2023년 추석.
우리 사무실 팀장이 내게 말했다. “변호사님. 신영호씨가 올해도 과일을 보내왔네요. 벌써 5년째 계속 추석과 설날에 보내시네요. 우리 고객도 아닌데, 아시는 분인가요?”
‘이 친구야... 자네가 우리 사무실에 입사한 지가 5년이라 그렇지, 지금 영호는 내게 20년 넘게 과일을 보내오고 있다네.“
#6
정말이었다. 영호가 취직한 그 다음해부터 영호는 내게 추석과 설날에 꼭 과일 한 박스를 보낸다.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처음 몇 번은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자그마치 20년 간이나 한결같이 선물을 보낸다.
중간에 전화를 한번 했었다. “영호야. 우찌 이리 오랫동안 명절을 챙기노?”
“선배님, 제가 힘들 때 한 번에 팍 도와주셨다 아입니까? 저는 그게 너무 고맙습니다. 고시에 미련도 없이 해봤거든요.”
하... 물론 연대보증을 선 일이 작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20년 넘게 이런 인사를 받을 정도의 일은 아닌데. 한편으로 나는 나를 도와준 그 누군가에게 이렇게 오랫동안 고마움의 마음을 가졌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언제나 마음 속 깊이 응원하는 내 소중한 후배라서 자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