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그냥 간단히 말해 주세요. 큰 문제 없겠지요?

by 조우성 변호사


<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53) 그냥 간단히 말해 주세요. 큰 문제 없겠지요?



#1


기업 자문팀의 민 변호사(2년차)가 고문기업인 K정유 법무팀 최 과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님, 이거 좀 급한 건이라서 그런데요. 굳이 의견서는 필요 없구요. 결론만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저희가 자회사 쪽에 급하게 자금지원을 해야 하는데, 이사회 결의는 다 거쳤구요. 다만 마땅한 담보를 받을 게 없어서 좀 걱정이긴 한데, 자회사가 이번에 결제 대금을 막지 못하면 모회사에게도 큰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그래서 자회사 대금 결제를 위해 모회사가 긴급자금을 이사회 결의 받고 빌려 주는 거, 큰 문제는 없겠지요?”



#2


민 변호사는 “어... 좀 더 구체적인 상황, 즉 대여하려는 금액, 그리고 자회사가 결제 대금을 막지 못하면 모회사에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적어 주시면 제가 저희 파트너 변호사와 협의해서 의견서로...”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 과장은 다급히 말했다.


“아이구 변호사님. 그렇게 거창하게 검토할 문제는 아니구요. 또 오늘이 저희 그룹 돈이 쫙 나가는 날이라서 오후 3시까지 결정이 나야 합니다. 어떠세요? 변호사님이 ‘탁’ 들어보니 별 ‘큰 문제’는 아닌 거 같지 않습니까? 의견서 말고 그냥 말로 답변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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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변호사는 머리를 굴렸다.


“네... 담보가 없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사회 결의는 거쳤으니 절차적 정당성은 확보한 거 같고. 또 자회사의 대금 미결제가 모회사에 미칠 악영향까지 고려한다면 뭐...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쵸? ‘큰 문제’는 없어 보이죠? 네, 감사합니다.”



#2


민 변호사의 위 전화 한 통은 엄청난 문제를 발생시킨다. K정유는 상장기업이었는데, 상장기업이 계열사에 자금을 지원할 때는 상법상의 절차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런데 K정유는 그 절차를 위반한 것이다.



상장사는 매년 회계 감사를 받는데, K정유가 이처럼 상법에 위반한 계열사 자금 지원을 한 것을 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에서 문제를 삼았다. 그리고 규모가 컸다(50억 원). 결국 그 회계법인에서는 감사 결과에 대해 ‘적정 의견’을 주기 힘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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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결과 적정을 받지 못하면 회사는 상장폐지가 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K정유는 난리가 났다. K정유 법무팀 최 과장은 윗 선에 이렇게 보고했다.



“그때 자회사 자금대여 문제 관련해서 법무법인 태평양 측에 자문을 구했고, 별 문제 없다는 답변을 받고서 그렇게 진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K정유 CEO가 엄청 화를 냈다. 로펌에서 엉터리 자문을 해주는 바람에 회사가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고 비난을 했다. 만약 상장폐지 절차로 가게 되면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로펌을 상대로 할 것이라는 의견을 보내왔다.



#3


로펌에서 일을 배울 때 선배들이 강조하는 내용.



‘절대 주니어 변호사가 함부로 대외적으로 의견을 내지 마라.’


‘대외적으로 의견을 줄 때에는 반드시 서면으로 하고 파트너 변호사의 확인/검수를 받아라.’



‘별 문제 없겠습니다’라는 간단한 의견 개진이, 의뢰인 회사로 넘어가면 ‘변호사가 검토했는데 문제 없다고 합니다’가 되고 그것이 하나의 기준이 되어 일처리가 진행된다. 그러다 문제가 발생하면 변호사는 완전 독박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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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 민 변호사의 일은 결국 어찌어찌 잘 수습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파트너 변호사들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써야 했다. 민 변호사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한 동안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가장 무서운 말이 이거다.


“변호사님, 간단히 말로 답변해 주세요. ‘큰 문제’는 없겠지요?”



이런 질문은 본인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지만, 그래도 일을 진행하고 싶어서 변호사의 지원사격을 받고 싶을 때 나오는 질문이다.


로펌 변호사가 간단한 자문 한 가지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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