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수처작주의 마음

by 조우성 변호사

<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55) 수처작주의 마음

#1


“영문레터 대략 작성은 하겠는데, 이거 수정받을 때마다 일일이 미국 변호사에게 물어 보는 것도 부담스럽더라,”

나는 자문 파트에 있는 신 변호사에게 내 고충을 털어 놓았다. 지금이야 번역 app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1998~1999년 그 당시만 해도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을 뒤적여야 했다.


대략 뜻은 맞출 수 있겠는데, 어감이나 톤이 과연 적절한지 자신이 없었다. 원래 로펌에서 영문 관련 일을 할 때는 원칙적으로 미국 변호사에게 검토를 맡아야 한다. 미국 변호사들은 한국 변호사가 작성한 국문을 번역해 주기도 하는데, 미국 변호사의 경우 한국어가 서투르기 때문에 국문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한국 변호사가 영문으로 써 놓은 것을 영문으로 고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래서 어떻든 나는 외국과 일을 할 때 영문으로 문서 초안을 써야 한다.


#2

“그래서 우리 자문 파트에서는 경희씨에게 많이 부탁해.”

아, 대표 변호사님 비서인 경희씨?

“경희씨가 영문과 출신이기도 하고 태평양에서의 짬밥도 상당하잖아. 그래서 웬만한 한국 변호사들보다 영작 실력이 뛰어나. 일단 경희씨가 한번 걸러주면 미국 변호사들이 봐도 별로 고칠 게 없더라구.”


로펌에서 비서직으로 근무하는 여직원들은 다양한 스펙과 경험치를 갖고 있다. 어떤 비서는 변호사가 시키는 복사와 잡일만 하는데 반해, 어떤 비서는 변호사들이 작성한 의견서 중 오타도 잡아내고 표현이 이상한 부분에 대해서는 변호사에게 자신의 수정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3

내 비서 태신씨도 내 의견서 중 잘못된 부분을 잘 짚어주었다. 내가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의견서를 써서 의뢰인에게 보내라고 주고 나면 좀 있다가 조심스레 들어와 내게 말한다.


“변호사님, 이 의견서 5페이지에 건축법 시행령 조문은 작년에 바뀐 거 같아요.” 헉.. 그랬나? 난 서둘러 법조문을 뒤져본다. 그랬구나.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신기한 듯 물어보니 태신씨는 수줍게 웃으며 말한다. “뭐 그냥. 타이핑하다가 혹시나 싶어 조문을 한번 찾아봤죠. 소 뒷걸음 치다가 쥐 잡은 격이에요.”


휴. 잘못된 법조문을 인용해서 의뢰인에게 나갔으면 무슨 망신이었을까. 안 그래도 이런 저런 일에 바쁠 텐데 굳이 따지면 변호사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까지도 혹시나 싶어 신경 쓰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스러웠다.


#4

2013년 즈음 법정에서 재판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여성이 내게 인사를 했다. 상당히 안면이 있었다. 누구더라?

“변호사님, 저 모르시겠어요? 저 00이예요. 태평양에서 비서로 근무했던...”

아! 기억났다.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옆 팀이라서 인사를 나눴던 그 비서. 어? 그런데 변호사 뱃지를 달고 있네?


“저 몇 년 전에 사법시험 합격했어요. 이제 겨우 변호사 1년차예요. 변호사님.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세요.”

오, 놀라웠다. 덕담을 나누고 헤어졌다.


#5

사무실에 돌아와서 오늘 만난 00씨에 대해 좀 알아봤다. 00씨는 비서로 근무할 때부터 남달랐단다. 일도 열심히 하고 시간을 아껴 시험공부를 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00씨와 상대방으로 만나게 되었다. 친절하게 인사한 사이였지만 막상 법정에선 투사로 돌변했다. 그 사건은 처음부터 우리 의뢰인이 실수가 있었던 건이긴 했지만 어떻든 나는 그 사건에서 패소했다. 00변호사는 초보 변호사라고 하기에는 정말 탄탄한 서면을 제출했었다.


#6

2023년 내가 사무실을 잠실 쪽에 오픈했을 때 00변호사가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왔다.


“조변호사님 덕분에 인천에서 자리잡고 잘 지내고 있어요 변호사님이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고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

내가 딱히 해 준 것도 없는데 나를 고맙게 생각한다니 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언제나 자기가 처한 곳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수처작주. 그 산증인이 00변호사이다.


p.s. 00씨가 본인 등판하시면(댓글로), 그 때 성함 공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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