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57) 머피의 법칙 2편
#8
HSL(이형석 변호사)이 지적한 부분이 생각보다 많았다. 지적사항을 커버하기 위해서 책과 판례를 뒤지며 상고이유서를 계속 보완해 갔다. 직원이 대법원에 상고이유서를 들고 가서 제출해야 한다. 송무팀 직원이 아까 내게 당부했었다. “늦어도 5시까지는 주셔야 저희들이 제출하고 퇴근할 수 있습니다.” 오케이. 앞으로 1시간 정도만 더 하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서면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전기가 나갔다. 모니터 화면이 꺼졌다. 이 방 저 방에서 ‘이거 뭐야!’, ‘아이 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이야 모든 워드프로세서가 기본적으로 자동저장 기능이 있지만 그 당시(1997~1998년)는 사용자가 자주 저장을 하거나 별도로 자동저장을 셋팅해 놓아야만 자동저장이 되었다.
‘앗! 내가 저장했었나?’
세상에, HSL의 지적사항을 충실히 반영한 새로운 버전의 상고이유서를 몇 시간째 작업하던 중이었는데,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그렇게 작업한 부분이 저장이 안 된 것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반. 컴퓨터 전원이 다시 켜진 후 문서파일 상태를 봤더니 예상대로 내가 애써 보완한 부분이 다 빠져 있었다.
#9
난 완전히 멘붕이 된 상태에서 송무팀 직원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 도저히 5시까지 서면을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송무팀 직원은 “그럼 대법원에 야간접수라도 하셔야죠”라고 했다. 야간 접수? 알아보니 대법원에서는(물론 다른 법원도 마찬가지지만) 당일 자정까지 민원실에 접수가 되면 불변기일을 지킨 것으로 해 준단다. 그래? 그럼 최악의 경우 오늘 자정까지만 작성해서 가면 된다는 거지? 그렇게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10
나는 다시 상고이유서를 보완했다. 한번 썼던 것을 다시 쓰려니 힘이 빠졌다. 하지만 두 번째 쓰다 보니 논리는 더 탄탄해 지는 느낌이었다. 저녁 9시쯤 서면 작업이 끝났다. 휴... 이제 출력만 하면 된다. 상고이유서는 6부를 출력해야 했다. 내가 쓴 상고이유서는 거의 40페이지에 육박했다. 출력만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밤 늦은 시간까지 비서를 붙잡아둘 수는 없었기에 내가 프린터로 출력을 시작했다. 파란색 피고인 용지에 착착 출력이 되고 있었다. 1부, 2부, 3부. 그런데 갑자기 프린터가 멈췄다.
뭐지? ‘토너 부족’이라는 경고등이 떴다. 이런? 다른 프린터에서 출력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내 컴퓨터는 특정 프린터와 네트워크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다른 프린터와 연결을 하려면 설정을 바꿔야 한다. 네트워크 설정을 어떻게 바꾸지? 전산실에 물어보니 이미 직원들은 다 퇴근한 상황. 나는 디스켓에 상고이유서 파일을 담은 후 내 동기 정 변호사 방으로 달려갔다.
“정 변호사, 자네 PC에서 이 파일을 좀 출력해줘. 내 PC랑 연결된 프린터가 토너 부족이래.”
그러자 정 변호사는 선선히 그렇게 해 주었다. 정 변호사 PC에서 상고이유서를 출력하는 와중에 갑자기 정 변호사 컴퓨터가 ‘바이러스 감염 의심’ 메시지를 띄우며 멈춰버렸다. 정 변호사는 내가 건네 준 디스켓 때문일 거라며 나를 원망했다. 아... 정말 아득했다.
#11
나는 결국 파일이 든 디스켓을 들고 출력서비스를 제공하는 킹코스로 갔다. 출력만 해주는 데 엄청 비쌌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다. 나는 킹코스에서 상고이유서 6부를 모두 출력했다. 오케이. 이제 대법원으로 가면 된다.
나는 서류를 챙겨서 지하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하필 내 차 앞에 다른 사람의 차가 이중주차 되어 있었다. 차를 밀어보니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 놓았는지 밀리지가 않았다. 차 앞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그때 시간은 벌써 밤 11시 . 어머나. 완전 위기상황.
나는 주차장에서 올라와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금요일 밤 11시 쯤에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 택시를 잡아본 일이 있는지? 안 잡힌다. 사람들이 도로로 막 나가서 차를 잡으려는데 차가 없다. 장거리 아니면 안 가려고 한다. 나는 역삼역에서 고작 서초동 대법원까지 가야 하니. 차가 잡힐 리가 없다. 나는 방법이 없었다. 대법원으로 달렸다. 간만에 뛰니 정신이 없었다.
#12
대법원 청사에 도착한 시간이 밤 11시 40분. 야간 접수창구를 찾았다. 수위 아저씨에게 물어 물어 야간 접수창구에 도착했다.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상고이유서 6부를 민원실 직원에게 제출했다.
민원실 직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세잎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1998. 9. 20. 23:50”이라는 접수인을 찍어 주었다. “이렇게 아슬 아슬 많이 오십니다. 변호사님만 그런 거 이닙니다.”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완전 다리가 풀렸다.
오늘 하루는 완전 머피의 법칙이 지배한 날이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불변기한에 임박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하루 이틀 먼저 일을 마무리 하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