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74) 주현씨 이야기
#1
비서인 태신씨가 내 방문을 열고는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아이 깜짝이야. 뭔 일이예요?”
그러자 태신씨가 우물쭈물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이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듣게 된 전후 사정.
대표변호사님 비서인 주현씨(가명). 내가 대표변호사님 뵈러 갈 때마다 워낙 친절하게 응대해줘서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다. 주현씨에게 고등학교 3학년 남동생이 있다. 주현씨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실상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데, 이 남동생이 자주 말썽을 피웠다. 이번에는 폭행사고를 일으켰고, 오늘 오후가 재판이란다. 그런데 아무 준비도 못하고 있단다.
#2
“아니 우리 사무실에 널린 게 변호사인데,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회사 방침이란 게 있고. 가족 사건을 그냥 변호사님이 뚝딱 처리할 수는 없는 거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주현씨가 그런 부탁하기 죄송해서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있는데. 제가 옆에서 보니 딱해서...”
“아니, 식구끼리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지. 일단 주현씨 내 방으로 오라고 해봐요.”
주현씨는 죄지은 사람마냥 위축이 되어 내 방으로 왔다. 오늘 오후 3시가 재판이었다. 주현씨가 걱정하는 것은 이 사건이 벌금으로 끝나지 않고 혹시라도 집행유예가 나올까봐서였다. 보니 예전에 폭행으로 처벌받은 전과도 있었다.
피해자가 전치 3주란다.
“피해자에게 피해배상은 했나요?”
“네, 500만원 달라고 해서 줬습니다.”
“그럼 피해자의 합의서나 처벌불원서 같은 거 받았나요?”
“아뇨, 그냥 500만원을 받았다는 영수증만 그 사람으로부터 받았습니다.”
#3
전과는 있지만 그리 큰 전과는 아니었고, 이번 사건은 포장마차에서 우발적으로 한 대 때린 것이 이렇게 된 일이라 잘만 하면 벌금형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처벌불원서’를 작성해서 주현씨에게 건넸다. “그 피해자에게 연락해서 여기에 도장 좀 찍어 달라고 해요. 인감증명서를 붙이면 좋은데, 시간이 없으면 그 사람 주민등록증 사본이라도 붙이구요. 지금 바로 다녀오실 수 있죠?”
“네, 안 그래도 오후 동생 재판이라 같이 갈려고 반차 신청해 두었습니다.”
다행히 피해자가 사는 곳이 방배동이라 서초동 법원이랑 멀지 않아 처벌불원서 받아서 법원으로 오면 오후 3시 재판시간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주현씨로부터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급히 변론요지서를 썼다. 우발적인 사고에 대한 경위 설명, 반성하고 있다는 점, 홀어머니 밑에서 누나의 보호로 살고 있는 점, 아직 학생인 점, 앞으로 누나가 잘 돌보고 사고 재발을 막겠다는 점 등. 사실 써놓고 보면 좀 뻔한 소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내용이 제대로 법원에 들어가는 것은 의미가 있다.
#4
“변호사님, 민사소송부 책임 변호사님께 말씀 안 드려도 될까요?”
흠...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정식으로 보고 절차 밟으면 변호사 특유의 신중함과 걱정 마인드로 인해 일이 복잡해 질 수 있었다..
“일단 재판 다녀올게요. 뭐 나중에 뭐라 하면 한 소리 듣는 거고.”
바깥 바람(로앤비)을 쐬고 와서 그런지 간도 좀 커졌다. 세상 일이 정답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닌데.
법정 앞에서 주현씨 동생을 만났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주현씨는 내게 피해자로부터 받아 온 처벌불원서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5
난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 착한 누나가 동생 때문에...
나는 동생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네 누나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널 돌보는데 넌 이래서 되겠냐. 그냥 이대로 감방 가서 한 1년 살다 나오게 만들어 줄까? 거의 협박을 했다.
그 동생은 눈물을 찔끔거렸다.
곧 재판에 들어갔다. 나는 처벌불원서를 증거로 제출하고 변론요지서도 제출하면서 구두 변론으로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강력히 요청했다. 내가 대형 로펌 소속인 것을 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피고인의 누나가 제 비서고, 제가 이 상황을 알고 도와주러 온 겁니다.”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6
3주 뒤 판결 선고. 벌금 200만 원형이 나왔다. 집행유예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며칠 뒤 내 비서 태신씨가 쇼핑백을 하나 들고 들어 왔다.
“주현씨가 너무 감사하다고... 아까 선물을 갖고 왔었어요.”
그리고는 나가면서 한 마디 했다.
“변호사님, 쫌 멋지네요.”
흐흐..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좀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다고 말할 수 있지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