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그룹스터디를 시작하다

by 조우성 변호사

<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81) 그룹스터디를 시작하다

#1

후배 신 변호사와 같이 상담에 들어갔다. 회사법상 명의개서와 관련된 다소 복잡한 내용이었다. 나는 의뢰인에게 사건 쟁점을 설명하고는 관련 대법원 판례를 알려줬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우리가 무난하게 이길 수 있는 사건이었다. 긍정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은 뒤 구체적인 비용제안을 드리기로 하고 회의를 마무리했다.

내 방으로 오려는데 같이 회의를 했던 신 변호사가 나를 붙잡았다.

“저기, 조 변호사님...”

신 변호사의 표정이 안 좋다.

“아까 회의 때 설명하신 그 대법원 판례. 몇 년 전에 변경됐습니다. 지금은 객관설이 아니라 주관설을 따릅니다. 따라서 우리 의뢰인은 상당히 불리한 입장입니다.”

뭐? 나는 깜짝 놀랐다. 판례가 바뀌었다고? 아...

신 변호사는 상당히 불만스런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아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저희 제안을 어떻게 줘야 합니까? 제 생각에는 이 사건은 안맡아야 할 것 같은데요... 패소가 명백한데...”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2

내가 파트너 될 때 내 승급을 반대했던 선배들이 떠올랐다. 자기 전공분야에서의 실력이 아직 미흡한 거 아닌가. 과연 그 실력으로 일을 했을 때 속칭 사고(?)를 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주로 이런 게 문제가 됐었다. 나는 아주 나이스하게 발언하고 잘 할 거라 호언장담했지만 오늘같은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나는 이제 선배들에게 지적받는 입장이 아니라 후배들을 지도해야 하는 입장이다. 내가 주니어 때를 돌이켜 보면 실력 있는 선배들에 대해서는 존경심과 경외감이 든다. 하지만 그만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선배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갖게 마련이다. 나도 이제 후배들에게 평가받는 입장이 되었다. 이런, 판례 변경을 놓치다니...

#3

사실 법률의 개정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법원 판례는 수시로 변경된다. 따라서 계속 판례의 변경을 따라가면서 공부하지 않으면 오늘 같은 실수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충분히 이길만한 사건이라고 판단해서 덜컥 수임하고 돈 받았다가 소송 진행 중에 불리한 대법원 판결이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사건에서 패소할 경우 그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인가 말이다. 나는 신 변호사의 그 실망스런 눈빛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4

각성이 필요했다. 당장 판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 동기 중 가장 법학 실력이 좋은 정 변호사에게 물어봤다. 판례 공부하려면 어떤 책을 보는 것이 좋냐고. 그렇게 해서 판례모음집 2권을 소개 받았다. 하루에 5개씩 판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5

“변호사님, 민법 공부를 새로 좀 하려는데 어떤 책을 보는 게 좋습니까?”

고문기업인 00공제회의 박 과장이 전화를 했다.

“예전 대학교 때 공부한 실력으로 울궈먹고 있는데, 이젠 안 되겠어요. 공부를 좀 해야할 것 같아서 말이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과장님. 저랑 같이 스터디 하실랍니까?:

“스터디...요?”

학창시절에 내가 싫어하는 수학을 그나마 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친구들이 내게 수학문제를 자주 물어봤고 내가 그 문제를 설명하려 노력하다보니 머리에 잘 남았기 때문이었다.

“과장님, 사실 저도 요즘 정비가 필요해서 민법 판례를 분야별로 공부하고 있거든요. 하루에 5개씩 하고 있는데, 이걸 같이 하시죠.”

“아이구, 제가 우찌 변호사님과 같이 스터디를 합니까? 저 그 정도 실력 안 됩니다.”

“부담 갖지 마시구요. 1주일에 한 두 번씩 저희 사무실에 오세요. 퇴근 무렵에. 그럼 제가 그 동안 공부했던 판례를 설명 드릴게요. 판례의 요지, 그리고 이 판례로 인해 업무를 할 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를. 저도 제가 설명할 대상이 있어야 지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 그럼 저는 설명만 들으면 되나요?”

“네, 공짜 강의 들으신다 생각하구요.”

#6

내가 생각해도 참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의뢰인을 불러 놓고 내가 공부한 판례를 설명했다. 남에게 설명하려면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박 과장은 내 설명을 듣고는 이것저것 질문을 한다. 그 질문에 답하다보면 나는 판례를 200% 이해하게 되었다.

“변호사님, 이거 자랑할게요. 지난 번에 위임해지 관련해서 판례 공부한 거 있었죠? 얼마 전 현업부서에서 계약서 작성하면서 위험하게 작성을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안 된다고 했더니 자기 주장만 하면서 제 말을 안 듣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대법원 판례를 딱 들이댔더니 바로 깨갱하더군요. 덕분에 제 실력 발휘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업그레이드된 박 과장은 조직 내에서 자신의 발언권을 더 강하게 가져갈 수 있었다. 나는 공부해서 좋고, 의뢰인은 실력이 좋아시면서 업무적으로 제대로 된 지침을 현업에 줄 수 있어서 좋고. 정말 일타쌍피의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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