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형사사건 변호는 가히 종합예술이라 - 2편

by 조우성 변호사

<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83) 형사사건 변호는 가히 종합예술이라 - 2편

#1

나는 명함을 내밀면서 “어제 강남경찰서에서 송치된 최희중씨 변호인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했다. 윤경위는 내 명함을 힐끗 보더니 “네, 알겠습니다.”라고 건조하게 답했다.

나는 최희중에 대한 변호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수사관으로서는 2년간 도피행각을 벌이던 사기 피의자가 갑자기 대형 로펌 변호사를 형사 변호인으로 선임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피의자가 자금을 뒤로 숨겨두었구나 라는 의심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의 오해를 피하고 싶었다.

“사실 피의자는 사회에서 알게 된 후배입니다. 기소중지 되었던 사실도 이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주위에 저 친구를 돌봐 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업이 망가지면서 이혼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나서서 무료변론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

“수사관님께 한 가지만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고소인의 고소 죄목은 ‘사기’인데요, 수사관님도 잘 아시다시피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피의자(최희중)가 고소인을 기망(속임)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제 파악한 바로는 피의자가 투자를 받을 당시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섞어서 투자유치를 권유하긴 했지만, 피의자가 고의적으로 투자자들을 속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투자를 받은 후 1년 만에 반도체 경기가 급속도로 안 좋아지면서 피의자가 운영하던 회사도 연쇄 부도 사태를 맞게 된 것입니다. 물론 투자자들의 돈을 받아서 회사를 운영하던 사람이 부도를 맞게 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사기죄’의 책임을 지는 것은 법상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부디 수사관님께서는 ‘피의자가 고소인을 기망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조사는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윤 경위는 내가 설명한 틀 안에서 희중의 진술을 많이 반영해 주었다.

“대략 1차 조사는 마쳤습니다. 다만 최희중씨가 2년간 도피생활을 했던 점 때문에 검찰에서는 구속영장을 청구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이 분을 굳이 구속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변호사님이 출석을 보증해 주시면 제가 불구속 수사를 할 수 있도록 검찰에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네, 제가 피의자의 출석을 보증하겠습니다. 필요하면 서류에 사인도 하겠습니다.” 나는 윤 경위가 제시하는 서류에 사인을 한 후 최희중을 데리고 경찰에서 나왔다.

#3

나는 윤 경위가 고마웠다. 변호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준 점도, 그리고 최희중에 대해 불구속처리해 준 점도. 이 고마움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변호인이 수사 중인 사건의 수사관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고민 고민 하다가, 고등학교 동기 중에 경찰대학을 나와서 당시 경찰청 간부로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다. 가장 부담 없이 수사관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언지. 그랬더니 그 친구는 “해당 경찰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글 하나 올려줘. 그건 나중에 수사관 근무평정에도 도움 되거든.”라고 방법을 알려줬다.

#4

나는 남양주 경찰서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자유게시판을 들어가 보았다. 상당히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대부분은 수사관의 수사태도나 경찰행정에 대한 비판의 글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저는 모 법무법인의 변호사입니다. 최근 지인이 기소중지 중 체포되어 남양주 경찰서에서 수사를 받게 되어 제가 변호인으로서 경찰서를 방문해서 수사관(경제2팀 윤00경위 ; 성함은 밝히지 않겠습니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수사기관에 계신 분들을 만나다 보면 다소 강압적이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변호인들에게 불친절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윤 경위님의 경우는 시종일관 차분한 태도로 제 의견을 경청해 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덕분에 저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제 의뢰인에 대한 구두변론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윤 경위님이 1차 수사가 끝난 뒤 불구속 수사를 검찰에 건의한다고 하셨을 때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헌법이나 관련 법률에 따르면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수사기관에서는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윤 경위님은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여 불구속수사 원칙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변호하는 이 사건이 어떤 처분이 내려질 지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사 결과’ 못지않게 ‘수사 과정’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윤 경위님처럼 수사 과정에서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를 준수하는 분으로부터 수사를 받게 되는 사람이라면 그 결과가 어떻든 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변호인도 이러할 진대 일반인들로서는 경찰서에 간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경찰서에 계신 분들이 윤 경위님처럼 차분하면서도 공정한 입장에서 적법절차를 지키는 수사를 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조우성 변호사 드림 ”

#5

그로부터 2주 뒤 윤 경위로부터 전화 연락이 왔다. 고소인과 대질신문을 해야 하니 최희중을 데리고 경찰서로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알았다고 답을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윤 경위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조변호사님, 고맙습니다. 저희 경찰서 인터넷에 올려주신 내용을 감찰부서에서 보고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다음 달 모범 수사관표창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뭐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너무 잘 써 주셔서...”

“아, 네. 제가 괜히 번거롭게 해 드린 것은 아닌지. 그런데 저로서는 정말 고마워서 그랬습니다. 그럼 내일 최희중씨 데리고 가겠습니다.”


남양주.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82) 형사사건 변호는 가히 종합예술이라 - 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