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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출근, 태평양의 문을 열다

[뚜벅이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

by 조우성 변호사

1. 첫 출근, 태평양의 문을 열다


뒤척임으로 밤을 지새웠다. 시계는 무정하게도 새벽 6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불면증에 시달린 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 공기의 서늘함 속에서 눈꺼풀을 떴다. 평소 같으면 끝없이 이어지는 달콤한 아침잠에 빠져들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 어떤 날과도 다른 운명적인 날이기에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1997년 3월 2일.

마침내 10년 가까이 이어진 고시생, 사법연수원생, 군법무관의 야인(野人)으로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변호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날이었다.


어제 세탁소에서 찾아온 빳빳한 양복을 걸쳤다. 참으로 오랜만에 넥타이를 매 보는구나. 군법무관 시절에는 주로 군복 차림으로 근무했던 탓에. 아직도 넥타이 매는 손길이 서툴기만 하다. 거울 속 낯선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이제 정말 변호사가 되는구나..." 가슴 한편으로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지하철에 몸을 실어 서울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신아빌딩, 태평양 로펌이 자리한 곳으로 향했다. 아침 러시아워의 지하철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 틈에 끼어 서니 어색함보다는 이상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껏 살아온 삶보다는 훨씬 역동적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피어오른다. 동시에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대표 변호사님의 환영사를 듣기 위해 신입 변호사 일곱 명이 대회의실에 모였다. 모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 태평양 로펌에서는 리크루트 팀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2년 정도 예비 신입 변호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나 태평양은 신입을 영입할 때면, 그 신입의 프로필을 전체 변호사들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절차를 거친다. 만약 단 한 명의 선배라도 해당 신입의 입사를 강력히 반대한다면, 물론 그 이유가 타당해야겠지만, 입사는 어려워진다고 했다.


그런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뚫고 일곱 명이 선발된 것이다. 작년 가을, 시니어 변호사님 몇 분과 서울 시내 한 한정식집에서 만나 '입사 확정' 소식을 들었던 날이 떠오른다. 막연한 기대감은 있었지만, 정작 태평양 쪽에서 '자네, 이제 우리와 함께 일하세'라는 확답을 듣고 나니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뻤었다.


"그래, 자네들이 올해 우리 태평양의 새로운 피로군. 두 손 들어 환영하네. 그래, 변호사란 말이야..."


김인섭(ISK) 대표변호사님. 법조계에서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분이시다. 판사 생활을 마치고 의기투합한 젊은 변호사들과 함께 태평양을 세운 뒤, 불과 10여 년 만에 업계 선두 로펌으로 키워내셨으니 말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아우라가 감돈다.


선배 변호사들이 사전에 신입들에게 귀띔해 준 말이 있었다.


"대표님이 본격적으로 말씀을 시작하시면 보통 두세 시간은 훌쩍 넘어간다네. 특히 '자, 이제 마지막으로...'라고 입을 떼시면, 그때부터 다시 30분은 거뜬히 더 가시니 각오해야 해. 그리고 중간에 화장실 다녀오겠다든가 하면 시간은 배로 늘어나니, 그 점 명심하고. 대표님이 질문을 던지실 때는 함부로 답변하지 말고 그냥 차분히 미소 지으면서 듣고 있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또 연설 시간만 늘어나니까 말이야."


하늘 같은 대표변호사님 앞에서 긴장하고 있는데다, 선배들의 충고까지 더해져 부동자세로 대표님의 일장연설을 경청했다.


대표변호사님은 태평양 로펌을 창립하던 시절, 의뢰인을 확보하는 한편 뛰어난 인재들을 발탁해 온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셨다. 마치 한 편의 대하소설을 듣는 것 같았다 발단-전개-절정-위기-결말. 그 다섯 단계 중 지금은 어디쯤 와 있을까, 생각하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표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대표변호사님의 말씀 중 인상 깊었던 한 대목이 있다.


"내 생각엔 말이야. 로펌은 사람을 키우는 곳이라네. 나는 훌륭한 인재들을 우리 조직에 영입해서 단련시킨 뒤, 결국엔 사회로 내보내야 한다고 믿어. 적어도 태평양에서 연마된 변호사라면 사회 어느 분야에서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는, 전인격적 역량을 갖추도록 만들고 싶네. 이건 내가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봉사라고 할 수 있겠지."


대표님의 인재 양성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로펌은 단순히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인재를 키우는 요람이다."

이 말씀이 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예상대로 대표변호사님은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건...'이란 말씀으로 넘어가신 후에도 30분이 훌쩍 넘도록 마무리 연설을 이어가셨다. 대표님의 연설이 끝나갈 무렵, 우리 모두의 표정은 마치 길고 긴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들 같았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마라톤은 이제부터였다.



대표님의 훈시가 끝나고 나서는 각 방을 돌며 선배님들께 인사를 드렸다. 당시 태평양의 변호사 수는 50명 정도였다. 지금은 300명을 훌쩍 넘는다고 하던데.


방이라고 해봐야 그리 크진 않고 아담한 정도였다. 검사실에 비하면 상당히 협소했다. 검사실의 경우 검사, 수사계장, 서무 직원이 한 팀을 이뤄 쓰다 보니 넓을 수밖에. 판사실도 부장판사만 독방을 쓰고, 배석 판사들은 2~3명이 한 방을 쓴다. 부장판사 방 크기의 반 정도 되는 듯했다. 하지만 나 혼자 쓰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각 변호사 방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광경은 마치 놀이동산을 연상케 했다. 한 변호사의 방은 마치 왕궁을 방불케 하는 화려함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높은 퀄리티의 페르시안 카펫이 바닥을 뒤덮고, 앤틱 가구들이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었으며, 벽에는 유명 화가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마치 미드에서나 볼 법한 샴페인 파티 장소 같았다.


반면, 또 다른 변호사의 방은 마치 쓰나미가 휩쓸고 간 듯한 아수라장이었다. 서류더미가 마치 히말라야 산맥을 이루듯 높이 쌓여 있어, 책상은 물론이고 의자까지 찾기 힘들 정도였다. 커피잔과 식기들이 군데군데 방치되어 있고, 심지어는 며칠은 된 듯한 피자 박스까지 발견되었다. 이 변호사는 분명 "창조적 혼돈" 속에서 일하는 걸 즐기는 유형인 듯했다.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는 변호사 방들을 구경하노라니, 마치 인테리어 박람회장에 온 기분이었다. 각 변호사의 성향과 스타일이 방 꾸밈새에 고스란히 투영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보고 난 후, 나는 결국 서류더미 속에서 한 줌의 광명을 찾아 헤매는 아수라장파로 귀결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내 성격상 화려함보다는 아수라장 스타일이 훨씬 익숙할 테니까.


이렇게 선배 변호사님들의 방문을 두드리며 차례차례 인사를 드렸다. 그때마다 선배님들은 모두 화사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셨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 담긴 속내는 딴판이었던 것 같다. 마치 "얘야, 우리 그동안 너희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단다. 제발 우리 일 좀, 아니 많이 덜어가 주렴.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단다!" 하는 절규 섞인 메시지가 읽혀지는 듯했다.


선배들과의 인사를 마치고 나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아빌딩 407호.

세상에, 내 방이라니... 아직 별다른 짐을 들여놓지 않아 커다란 책장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내 이름이 정교하게 새겨진 자개 명패가. 손바닥으로 내 이름을 어루만졌다. 아, 이런 감격이로구나. 목청껏 '야호!'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 화정씨가 들어왔다.


"조 변호사님, 환영합니다. 제가 앞으로 모시게 될 이화정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전담 비서라니. 또 한 번 감동의 물결이. 변호사 두 명당 한 명의 비서가 배정된다고 했다. 대개 신입 변호사에겐 경력 많은 비서를 붙여준다더니. 화정 씨는 5년 넘게 송무 담당 비서로 일해 온 베테랑이었다.


나는 화정 씨에게, 내가 좀 서툴러서 힘들게 할 수도 있으니 앞으로 많이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화정 씨는 이미 각오하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변호사님. 제가 열심히 보좌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함께 좋은 팀워크를 만들어 나가요."


화정씨의 말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치 험난한 정글에 들어서는 모험가에게 믿음직한 가이드가 생긴 기분이었다. 앞으로 이 법률 정글에서 우리는 무시무시한 '서류 맹수'들과 싸우게 될 터였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불빛 하나하나가 내 앞날의 도전과 기회를 상징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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