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포스의 법정 : 신화 속 현대법 읽기](4) "사랑과 전쟁 사이의 헬레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불륜 사건이 있다.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도망쳤고, 이는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했고, 그 선택은 수천 명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3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이 신화적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법적 통찰을 제공할까?
#1.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렌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헬레네는 자신의 선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당시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의 '선택'은 존재했을까? 결혼이 정치적 동맹의 수단이었던 시대에서, 그녀의 도주는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었을 수 있다. 민법상 혼인의 자유는 기본권으로 보장되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강제결혼과 가정폭력은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헬레네의 선택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2. 동의와 강압 사이
신화는 파리스가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는 현대법의 관점에서 '자유의사'와 '강압'의 경계를 생각하게 한다. 형법상 유인죄는 기망이나 위계를 동반할 때 성립한다. 신의 개입이라는 설정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외부 압력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보여준다. 이는 현대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나 그루밍 문제와도 맥이 닿아있다.
#3. 국제법과 망명의 문제
국제법은 폭력과 박해를 피해 도망친 이들에 대한 보호를 규정한다. 난민협약은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한 보호를 명시하고 있다. 트로이가 헬레네를 받아들인 행위는 현대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이는 인도적 보호였는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이었는가? 현대의 정치적 망명 문제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4. 전쟁범죄와 비례성
전쟁법의 관점에서 보면, 한 여인의 도주에 대응해 도시 전체를 파괴한 것은 명백한 과잉 대응이다. 현대 국제법은 무력 사용의 비례성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는다. 민간인 학살과 도시의 파괴는 전쟁범죄를 구성한다. 이는 개인 간의 분쟁이 어떻게 집단적 폭력으로 비화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는 멘엘라오스가 트로이 함락 후 헬레네를 용서했다고 전한다. 이는 복수와 용서, 정의와 화해라는 인류의 영원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사회가 어떻게 치유되고 화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전쟁과 사랑은 모두 진실의 첫 번째 희생자를 만든다" - 에스킬로스
이 신화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개인의 선택은 어디까지 존중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사회적 대가는 누가 감당해야 하는가?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이 질문들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