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이 주는 선물: 적, 인생의 멘토>
살갗을 스치는 바람에 날이 선 기운이 묻어난다. 이럴 때면 으레 호젓한 서재에 틀어박혀 묵은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다. 손때 묻은 고전 한 권이 눈길을 잡아 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17세기 스페인의 예리한 통찰이 담긴 잠언집이다. 그중 한 구절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리석은 자가 친구로부터 얻는 것보다 현명한 자가 적으로부터 얻는 것이 더 많다.”
이는 지혜와 적이라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주는 묘한 울림을 안긴다. 어쩌면 우리 삶을 지탱하는 진실은, 부드러운 솜이불이 아닌 거친 사포의 표면처럼, 불편한 진실 속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벗과 적, 이 두 존재는 인간관계의 양극단을 상징한다. 친구는 따스한 위로와 지지를 건네는 존재이다. 그들의 칭찬은 때로 쌉싸름한 보약보다 달콤한 사탕과 같다. 반면 적은 날 선 비판과 냉혹한 평가로 우리를 할퀴는 존재이다. 그들의 말은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고통을 준다. 그러나 그라시안은 이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어리석은 자는 친구의 달콤함에 취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의 칭찬은 때로 아편과 같아서, 진실을 가리고 성장을 가로막는 장막이 된다. 반면 현명한 자는 적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직시한다. 적의 날카로운 지적은 뼈아프지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자신을 연마하는 숫돌이 된다. 상처는 별을 잉태하는 자궁과 같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별과 같은 이유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 지혜는 유효하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그 속에서 ‘좋아요’와 긍정적인 댓글은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때로는 허상에 불과할 수 있다. 진정한 성장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에서 비롯된다. 건설적인 비판을 제공하는 사람은 적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멘토일 수 있다. 그들의 지적은 우리 내면의 그림자를 드러내고, 곪은 상처를 도려내는 수술과 같다. 물론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이겨냈을 때 우리는 더 단단한 내면을 얻게 된다. 고통은 영혼을 벼리는 대장간의 불꽃이다.
그라시안의 통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적은 단순히 비판을 넘어, 우리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잠재력을 일깨우는 존재이다. 경쟁과 갈등은 때로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더 강하게 단련시키는 용광로와 같다. 경쟁자의 성공은 우리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분발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된다. 그들은 우리가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채찍질하는 존재이다. 역설적이게도, 적은 우리 삶의 역동성을 부여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인생이라는 거친 항해에서, 적은 우리를 목적지로 이끄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적은 우리 내면의 잠든 거인을 깨우는 고독한 알람시계와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적을 현명하게 대해야 할까? 적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그들의 존재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그들의 강점을 배우고, 그들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진정한 지혜는 적을 적으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성숙의 징표로 여기고, 꿋꿋이 이겨내야 한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적은 우리가 더 나은 배우로 거듭나도록 돕는 감독과도 같다.
어쩌면 적이라는 존재는 우리 삶에 던져진, 풀기 어려운 숙제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숙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성장과 성숙이 결정된다. 적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응시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그라시안의 지혜를 가슴에 새기고, 우리 삶에 던져진 숙제를 현명하게 풀어낼 차례이다.